이종선 전 호암미술관 부관장
삼성家 문화재 수집사 출간
“고미술품 역사적 가치 높여야”
이병철 회장은 일어나자마자
“가야금관 우에됐노?” 애지중지
출근하는 이건희 회장 붙잡고
“이건 잡아야 합니다” 설득해
국보 백자달항아리 수집하기도
“골동계에서는 ‘좋은 물건은 모두 삼성으로 간다’고 했어요. 그만큼 항상 구설도 따랐죠. 말 못할 사연이야 많아요. 하지만 그런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고고학자로서 ‘박물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한 제 젊음과 평생이 고스란히 담긴 이 컬렉션의 가치에 대해 돌아보고 싶었어요.”
삼성은 지금 가진 국보ㆍ보물급 문화재는 총 152점이다. 서울 리움미술관과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 국보 37점, 보물 115점을 갖고 있다. 이병철ㆍ이건희 회장은 대를 이어 청자, 백자, 불상, 회화 등을 애지중지 사 모았다. 재벌 회장, 기업 문화재단, 미술관이 큰 손으로 부상하자 고미술 시장의 고급 정보가 그들에게 몰렸다. 창업 이래 이들이 이 ‘고급 취미’에 얼마를 썼는지, 누구에게 어떤 돈으로 샀는지, 사들인 물품 목록, 진품과 가짜의 비율 등은 공개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이종선(68) 전 호암미술관 부관장이 최근 내놓은 책 ‘리 컬렉션’(김영사 발행)이 미술계와 재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한 그는 석사과정 중이던 1976년 삼성문화재단에 입사해 호암미술관 전문연구원, 학예연구실장, 부관장을 거쳤다. 20여 년 재직 후 퇴사해 동국대 교수, 서울역사박물관 초대관장, 경기도박물관장 등을 지냈다.
이 전 관장은 28일 서울 가회동 김영사 사옥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한 기업 주변의 회고록이 아닌 수집가로 지켜본 한국 문화예술계의 단면을 그리고 싶었다”며 “해외 반출 문화재를 우여곡절 끝에 들여오고, 수집품을 박물관에 전시 형태로 공개한 것은 무시 못할 기여”라고 말했다.
“이군, 삼성으로 가게”라는 은사 김원룡 교수의 통보에 “앞으로 공부는 다했구나”싶어 밤새 술을 펐다는 이 전 관장은 석사과정 도중 호암미술관 개관 준비에 투입됐다. “당시에도 수집품은 꽤 있었지만 이병철 회장 개인 취미라 회사에서 터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어요. 회사 소유품 대장은 있었지만 나머지는 아니었고. 새 미술관 수장고 정리부터 대장 체계를 만들고 개관을 준비하는 작업 등 혼자 해야 하는 일이 많았죠.”
낯선 환경이었지만 가용자본이 많고 이병철 회장의 수집 활동이 워낙 왕성했던 탓에 그는 금방 재미를 붙였다. “수집은 돈만 있어도 할 수 있지만 대중의 역사교실 역할을 해야 하는 박물관 설계는 그렇지 않다”며 “명품을 가려내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 멋스러운 박물관을 조직한다는 게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후에 (제가)삼성의 (문화재)수집 창구라는 소문이 나자 별별 사람이 다 몰렸는데 99%가 사기꾼이었어요.”(웃음)
수집품마다 적잖은 노력을 쏟은 탓에 얽힌 사연도 가지가지다. 대표적인 건 일본, 미국을 거쳐 역수입해온 고려 불화 ‘아미타삼존도’(국보 제218호). 일본 경매에 나온 것을 국립중앙박물관, 삼성 등 한국쪽에서 사들이려 하자 돌연 일본 소장자들의 태도가 냉랭해졌다. 고려 불화가 일본에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일 감정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제3국에 팔길 바랐던 것이다. “이걸 들여오기 위해 삼성물산 미국 지사를 통해 미국에 구입비선을 만들어 우회 수입한 거죠. 미술품에 대한 통관 근거가 아예 없어 상공부 고시 근거가 마련될 때까지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는 등 007 작전을 방불케 했어요.”
이병철 회장의 개인 소장품 중에는 그도 정확한 출처를 알지 못하는 물품이 수두룩했다. 유난히 애착을 두었던 가야금관(국보 제138호), 청자진사주전자(국보 제133호)이 대표적이다. 이 전 관장은 “일어나자마자 ‘금관 우에됐노?’ 하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이병철 회장이 좋아했는데, 금관을 넘긴 이의 말을 듣고 실제 연대(5, 6세기)보다 앞선 최초의 금관이라 믿은 탓”이라고 말했다. 도굴품인줄 알면서도 사들인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서는 “골동상인들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만 답했다.
삼성의 문화재 수집은 이건희 회장 시절에 더 적극적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본인이 직접 판단해 ‘값이 싸면서 좋다’는 작품만 거두는 경향이 강했지만, 이건희 회장은 전문가 확인만 있으면 별말 없이 결론을 냈어요. ‘특급이 있으면 컬렉션 전체 위상이 올라간다’는 지론 때문인데, 결과적으론 통했죠.”
이 시기 대표 수집품으로는 ▦출근하려 옷을 입던 이건희 회장을 붙잡고 “이건 잡아야 한다”고 말해 사들인 백자 달항아리(국보 제309호) ▦평생 가난 속에 문화재를 지켜온 골동품상 김동현 선생으로부터 매입한 고구려반가상(국보 제118호) ▦일본에 넘어간 우리 문화재가 조총련 등을 통해 소위 ‘김일성 컬렉션’으로 북에 상납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재일동포 사업가에게서 구입한 화조구자도(보물 제1392호) 등이 있다.
그는 “몸 담았던 조직에 대한 예의상 책 출간 사실을 미리 알려 논의했다”고 했다. 그 탓인지 세간의 눈이 집중될 만한 부분에선 “우여곡절 끝에” 등의 표현으로 맥락을 눙치기도 했다. 이 전 관장은 민감한 질문에는 대체로 말을 아꼈지만 고미술품 거래 풍토에 대해서만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공신력 있는 선진국 박물관에서는 모두 유물의 출토 경위, 출처에 대한 정보를 방대한 기록으로 정리합니다. 그 사연의 역사적 가치와 유물의 미적 가치가 만나 명품으로 인정받는 것이죠. 우리는 그 부분이 붕 떠있죠. 이력을 추적하면 중간 행태가 수상스럽고, 콜렉터가 세금을 안내고 몰래 가지고 있다 넘기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국보급 유물에 대해서조차 쉬쉬하며 넘어가는 거죠. 후진국만 이렇습니다.”
각종 문화사업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 중인 그는 앞으로 매년 박물관, 동아시아 문화재 등과 관련한 책을 집필한다는 계획이다. “전문가의 식견과 문화재에 대한 인식 수준, 박물관 비전에 대한 명확한 목표가 양질의 컬렉션을 만듭니다. 우리처럼 2대째 가는 골동상 보기가 어렵고 거래 행태가 불투명한 환경에선 갈 길이 멀죠. 문화재와 박물관의 진정한 가치, 미래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알리고 싶습니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김다은 인턴기자 (성신여대 생활문화소비자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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