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삶과 문화] 겨울, 모듬살이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겨울, 모듬살이

입력
2016.01.28 13:41
0 0

“들어올 때 돼지고기 두어 근 사오니라.”

육식을 멀리하여 정육점에 가는 일이 없는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나는 단박에 알아듣는다. 요즘 거의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마을회관에서 공동으로 반찬 삼을 고기를 좀 사오라는 뜻이다. 농사철에는 늘 함께 살다시피 하지만 겨울에는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시내에서 생활하는 나로서는 늙으신 부모님의 섭생이 마음에 걸린다. 입식부엌이긴 해도 건강이 썩 좋지 않은 어머니가 끼니를 끓여 드시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겨울이면 아예 마을회관에서 하루 두 끼를 해결하고 있어서 걱정 하나를 덜었다. 가끔은 찬거리가 마땅찮아 오늘처럼 고기며 나물 따위를 부탁하기도 하는데 그 정도야 기쁘게 감당할 일이다.

우리 마을은 열일곱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인데 그 중에 가장 겨울을 나기 좋은 집이 바로 경로당을 겸하고 있는 마을회관이다. 난방비 걱정 없이 늘 뜨끈뜨끈하게 불을 넣고 대형 텔레비전이며 고급 안마의자 등속을 갖추고 있다. 보통 십여 명의 노인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지내고 정 추운 날에는 잠을 자기도 한다. 그 중에 젊은 축이나 건강한 사람들이 밥을 하고 설거지까지 도맡아서 하니까 연로한 분들에게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물론 회관 운영경비는 관에서 나온다. 쌀은 현물로 나와서 남아돌 정도이고 노인회를 통해 나오는 반찬값이며 난방비, 전기세 등도 그다지 모자라지 않다. 거기다가 마을 공동소유의 논과 밭에서 나오는 수입이 더해져 한 달에 두어 번은 시내로 나가 외식을 하거나 단체로 목욕탕을 가기도 한다.

나로서는 마뜩잖은 것도 있다. 남자노인과 여자노인들이 종편이냐 드라마냐를 두고 벌이는 리모컨 쟁탈전이라든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게 민화투나 치는 일인 것을 보며 노년이 이렇게 피폐해도 되나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마을에서 늙으며 회관에는 되도록 출입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기도 한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장점이 따로 있으니 회관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최소한의 복지와 안전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결코 누구도 고독사를 한다거나 위급한 일에 닥쳐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부에서 주는 직접적인 지원 말고 ‘5호 담당제’ 비슷한 제도가 있다. 노인들 상호간에 한 사람이 서너 사람의 안부를 아침저녁으로 챙기고 그 내용을 보고하는 것인데 우리 마을의 경우는 늘 함께 지내다시피 하니까 따로 챙기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 대가로 두 노인이 한 달에 이십만 원씩 받는다. 일주일에 한 번은 생기 넘치는 중년의 도우미가 찾아와 ‘구구팔팔’이라는 운동도 시켜준다. 구십구 세까지 팔팔하게 살라는 뜻이란다. 이 모든 게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니 도시 사는 자식으로서는 적잖이 마음을 놓게 된다.

정부에서 주는 별 것 아닌 도움에도 감읍하며 세상이 좋아졌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노인들이 얼마 전 영화 ‘내부자들’에서 들은 충격적인 대사, ‘대중은 개돼지’라는 말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이 정도의 안전장치를 고맙게 여긴다. 물론 마을의 노인들은 오랜 농경생활을 통해 지니게 된 ‘더불어 사는’ 원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우리가 사는 방식은 그런 모듬살이에 익숙한 것이었다. 아무 대가없이 마을 공동의 김장과 장을 담그고 겨우내 밥과 반찬을 만드는 마을의 아주머니들은 경탄스러운 존재들이다. 결코 국내총생산(GDP)에 잡히지 않는 이런 상호부조의 삶은 ‘오래된 미래’일지도 모른다. 삭은 울바자처럼 스러져가는 농촌에서 이 촌로들의 겨울나기를 보며 나는 한사코 작은 희망이라도 찾아보려는 것이다. 저 탐욕의 숫자들이 아예 돌아보지 않는 곳에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최용탁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