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세대가 무너지고 있다. 2015년 6월 기준, 청년 실업률이 10.2%다. 실업상태인 청년은 전 연령 평균의 두 배 반에 이른다. 청년 중 취업애로계층은 116만명이다. 실업자, 추가 취업 희망자, 잠재 구직자를 모두 더한 걸 취업애로계층이라 부르는데, 116만이라는 숫자는 ‘문제적인 규모’다. 대기업에 취업하는 청년은 겨우 1%, 전체 정규직 일자리를 다 합쳐봐야 겨우 절반의 청년들만 취업에 성공한다. 나머지는 계약직을 전전하는 미생으로 남는다.
기성세대는 늘 ‘요즘 젊은 것들’의 모자람을 탓한다. 의욕이 없고, 투지가 빈약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세대. 이런 류의 ‘기성세대 담론’은 4,000년 전 이집트 피라미드의 상형문자나 바빌로니아 골목길의 낙서에서도 발견된단다. 우리 때도 만만치 않았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찬 기성세대의 호통들인데, 과연 50대 아버지세대의 기준으로 자식세대를 나무란 단 게 가당한 일일 것인가.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1961년생과 91년생을 비교해보자. 현재의 1인당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3만달러 시대 목전이다. 61년생이 태어난 해의 1,000달러보다 30배로 부자가 된 건데, 광복 이후 산업화의 기적을 이룬 할아버지 세대가 추진한 발전전략의 성공 덕분이다. 방글라데시 같은 빈국에 태어나서 ‘주요 10개국(G10)’의 선진한국을 주름잡는 게 지금의 50대들인 거다. 여기서 잠깐, 당연한 일 한 가지. 소득 6만달러를 지향하는 나라의 국가경영은 1,000달러짜리 나라의 전략과는 달라야 한다. 부모 덕분에 ‘30배의 부유해짐’을 경험한 세대가 ‘성장의 한계’를 인내중인 세대를 나무란다는 건 가당찮은 오만이다. 물려줄 미래전략도 준비하지 못한 주제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정상일 것이다.
복지정치의 폭발 이후 GDP대비 10%대로 진입했고 속속 확충될 복지를 생각하면 91년생이 누릴 국가복지가 더 클 공산이 농후하다. 하지만 두 세대가 감당해야 하는 복지부담의 정도는 비교도 안 되는 상황이다. 2010년 노인부양비는 15.2%로 생산인구 7명 정도가 노인 하나를 맡으면 됐다. 2040년에는 57.2%로 급증, 두 명도 안 되는 생산인구가 노인 한 명을 먹여 살려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등교육의 혜택도 청년세대가 기성세대보다 많이 받았다. 61년생의 대학진학률이 30%도 안 된데 비해, 91년생들은 80% 가까이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들이 한창 직장 구할 나이 대에서의 노동시장상황은 극과 극이다. 61년생들이 청년실업률 5% 남짓을 경험한 반면, 91년생들은 두 자리 숫자를 넘어선 청년실업을 경험 중이다. 2016년부터 법정 정년이 60세가 되면 ‘청년고용절벽’이라는 극단적 사태마저 예상된다. 1986년과 2014년의 합계출산율은 1.6과 1.2 정도로 엄청난 격차를 보이는데,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주택구입, 희망, 꿈을 모두 포기한 ‘7포 세대’라는 자조가 섬뜩한 순간이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잉태하는 근원으로서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못 구하는 청년들의 고용절벽. 복지국가전략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처럼 한국경제를 이끄는 대기업의 공장들은 인공지능과 로봇에 의해 굴러간다. 기술발전의 낙수효과로 중소기업도 조만간 그렇게 될 텐데, 고용 없는 성장이 현실인 상황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통하지 않는다.
점점 더 기울어져만 가는 세대 간 정치게임의 운동장 속에서 사회경제적 불균형에 관한 청년세대의 분노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고 했다. 문자 그대로 세대전쟁 일촉즉발의 형국이다. 복지국가의 성숙과정에서 모두가 당면하는 일이 세대계약의 창출과제다. 지속가능한 세대계약을 일방통행식 다수결의 선거정치로 이뤄낸 역사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합리적 이성과 호혜적 토론에 근거한 합의의 정치가 필요한 순간이다. 1,000달러 세대의 촌스런 눈길로 6만달러 세대를 단죄치 말자. 청년세대와 합의한 나눔의 정치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기성세대의 노후마저 비틀거릴 것이다.
안상훈 서울대 교수ㆍ사회정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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