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중’ - 내 마음을 수술한 다섯 시간
‘수술 중’
불이 켜졌다. 그날, 나는 의사가 아니었다. 환자 보호자였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호자였다.
수술 예정 시간은 다섯 시간이었다. 내가 메스를 잡을 때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날은 평생과 비교해도 결코 짧지 않을 만큼 길었다.
수술은 다급하게 잡혔다. 불과 며칠 전, 아버지가 예고도 없이 병원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갑상선암이란다. 개안켔제?”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긴장한 기색이 비쳤다.
“아버지 갑상선암은 암도 아닙니다. 치료기술이 좋아서 금방 치료됩니다. 제가 동산병원에서 제일 잘하는 선배한테 수술 부탁할게요. 걱정 마세요.”
나 역시 큰일 아니라는 듯 평소의 목소리를 유지했다. 내 말에 아버지는 “그렇지.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하면서 병실 밖으로 나가셨다.
진료실 문이 닫히자마자 눈을 감았다. 현기증이 일었다. 말은 쉽게 했지만 갑상선암은 알 수 없는 병이다. 피부를 절개해서 암이 발생한 부위를 확인하기 전에는 전이 정도를 알기 힘들다. 말 그대로 수술을 하기 전에는 결과를 예단할 수 없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죄책감이 일었다. 명색이 의사인데, 아버지 몸에 암 덩이가 자라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니. 가족에게 무심했던 것이 사무치도록 후회됐다.
“같이 들어가자.”
집도할 선배가 수술실에 같이 들어가 과정을 지켜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나는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내 눈으로 아버지의 암 덩어리를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우리 병원에서 최고 실력 있는 선배가 집도를 하니까 깨끗하게 수술이 될 겁니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이 거칠고 차갑게 느껴졌다. 평생 교편을 잡은 아버지였지만, 막노동을 하는 사람처럼 거칠고 투박하게 느껴졌다.
나를 등에 업고 30분 넘게 뛰었던 아버지
아주 오래전, 아버지의 손을 잡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뜨겁고 부드러웠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나는 공작물 숙제를 하고 있었다. 무얼 만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 나에게는 무척 정교한 작업이었다. 제일 세밀한 부분을 작업할 때였다. 접착제를 정확하게 바르려고 나뭇가지를 눈앞에 바짝 대고 순간접착제를 꾹 눌렀다. 그 순간 눈알이 화끈거렸다. 나뭇가지로 눈을 쿡 찌르는 것 같았다. 접착제가 눈에 튄 것이었다.
“아아악!”
내 비명을 듣고 아버지가 거실로 뛰어들어 왔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골목을 막 벗어나다가 내가 넘어지고 말았다.
“업자!”
아버지는 나를 훌쩍 들쳐 업고 뛰었다. 얼마 안 가 아버지의 등이 땀 때문에 축축해졌다. 헉헉거리는 소리가 경적소리처럼 크게 들렸지만 아버지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나는 계속 악을 쓰며 울었다.
의사가 진료를 할 동안 아버지는 내 팔과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아버지의 손은 불덩이 같았다. 가파른 숨소리는 차츰 잦아들었지만 손은 여전히 뜨거웠다. 눈에 통증이 가라앉을 즈음 의사가 물었다.
“자, 여기 한번 봐라. 이거 몇 개야?”
눈을 떴다. 의사가 내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펴서 흔들고 있었다. 나는 거기엔 대답도 않고 내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를 쳐다봤다. 안도감에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아버지의 평소 모습은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였다. 아들 앞에서는 더 그랬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근무했다. 다른 반에서는 농담도 하고 재미있게 수업을 하면서도 우리 반에 들어오면 무뚝뚝해졌다. 발표를 시킬 때도 (다른 반과 다르게) 학생 이름을 부르지 않고 번호를 불렀다. 내 이름을 부르기가 어색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자, 주목. 고개 들고 앞으로 봐라.”하고서 설명을 할 때도 나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책을 들고 있는 아버지의 손을 쳐다보곤 했다. 그 손은 내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력을 잃었을 때 세상과 나를 연결해준 감각의 끈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이 언제나 따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학원비도 책임 못 지면 어떡해요!”
“왜 그렇게 차가워졌을까. 어느새 그렇게 거칠어졌을까……”
나는 ‘수술 중’이라는 글씨를 쳐다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자처럼 따뜻하고 부드럽던 손이 언제 저렇게 거칠어졌을까. 초등학교 이후 한 번도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나 나나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까닭이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손이라도 자주 잡아드릴걸. 혹시라도 이렇게 훌쩍 떠나면, 아버지는 아쉬워서 어떡하고 나는 죄송해서 어떻게 하나…….
아버지의 손이 저렇게 거칠어질 동안 나는 내 앞길에만 몰두하고 살아왔다. 얼굴이 무릎 사이에 묻히도록 고개를 숙였다. 그때 내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공부하겠다는데 왜 돈을 안 줘요? 부모님이 학원비도 책임 못 지면 어떡해요.”
고3 때였다. 수능을 친 후에 친구들과 영어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등록금이 5개월에 100만 원이었다. 학원비를 달라고 했더니 부모님이 없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데 며칠 후 아버지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학원 등록해라.”
그 안에 백만 원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길로 학원에 등록했지만 한 달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 즈음 우리 집안은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뭔가 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이사를 했고, 부모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크게 실감하지는 못 했다. 기숙사에서 생활한 까닭이었다. 주말에 한 번씩 집에 들렀기 때문에 그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IMF 때문에 친척이 하던 사업이 기울면서 그 여파가 우리 집까지 덮쳤다. 아버지가 사업 보증을 서주었던 것이다. 부모님 월급이 절반 가까이 압류로 빠져나갔고, 집도 날아갔다. 결국 월세방으로 옮겼다.
아버지가 친척의 보증을 섰다는 건 대학에 진학한 후에야 들었다. 그 고생을 하고서도 그분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친척 때문에 집이 날아갔는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낼 수 있습니까?”
어느 날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여쭈었더니 아버지는 ‘선생님’다운 말씀을 하셨다.
“사람과 돈을 저울에 달면 세상 모든 돈을 접시에 올려도 사람 한 명 무게를 못 이길 거다. 사람이 돈보다 소중한 거야.”
그러면서 의사로서의 마음 자세를 일러 주셨다.
“넌 특히 그걸 더 명심해야 한다. 병원을 차리면 절대 환자를 돈으로 보지 마라. 의료인은 돈과 환자를 딱 분리시켜서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는 오히려 친척을 더 챙겼다. 혹시나 자식들 마음에 원망이 생길까 봐 정확한 부채 규모를 말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가 내 의과대학 등록금을 상환하는데 10년이나 걸렸다.
‘명함 환자’ 많이 올수록 행복해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수술 중’이라는 글자를 쳐다보면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기도라는 걸 해봤다. 불길한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눈을 뜬 채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내 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겪어도 좋으니, 수술 결과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제발 꿈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끝났다.”
가족 중 누군가가 외쳤다. ‘수술 중’에 불이 꺼졌다.
‘수술 끝’
나는 벌떡 일어섰다. 몇 발짝만 움직이면 수술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 했다. 선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선배가 환하게 웃으면서 수술실 문을 열었다.
“천만다행이다. 암이 안 퍼졌더라. 수술 잘 됐으니 걱정하지 마라.”
나는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버지는 아직 마취 상태였다. 병실로 옮기는 동안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후두득, 눈물이 떨어졌다.
수술 2년 뒤,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하셨다.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했다. 스승이자 아버지인 그분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날 나는 새 출발을 하는 기분이었다. 수술실에서 간절히 기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도록 태무심한 아들이 되지 않겠다는 결심이 새삼스레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아버지가 나를 키우고 가르치신 것처럼, 이제는 내가 아버지를 돌봐드릴 차례였다. 생각해보면 그 다섯 시간 동안 아버지는 몸의 병을 고쳤지만 나는 내 마음을 덮고 있던 무관심이라는 두터운 먼지를 깨끗이 털어냈던 것 같다.
내가 아버지의 주치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아들로서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아버지 잘 계시냐?”고 물으면 “때때로 즐겁게 지내신다.”라고 대답한다.
“때때로 즐겁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때때로’ 진료실에 내 명함을 들고 찾아오는 환자들이 있다. 아버지에게 소개를 받았다는 거였다. 그분들은 대개 “아버지가 아드님을 참 자랑스러워한다.”는 말을 전한다. 내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즐거운 표정이더라고 했다.
명함을 들고 오는 분은 진료비가 무료다. 내가 접수대에 나가서 대신 낸다. ‘명함 환자’가 늘수록 대신 지불해야 하는 진료비가 늘지만 금액이 커질수록 기분이 좋다. 그것은 아버지가 내게 해주시는 칭찬의 양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부자가 얼굴을 맞대고 칭찬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할 ‘용기’는 없지만 이렇게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다. 이런 방법으로나마 아버지와 마음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오정섭
대구에서 태어나 자랐다. 능인고등학교를 졸업 후 계명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계명대학교 재활의학 석사 학위 취득 후 동산의료원 재활의학과 전공, 청도 군립요양병원 재활의학과 과장, 청도 대남병원 재활의학과 과정,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외래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남산병원 재활의학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정리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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