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웨스트윙은 미국 대통령의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다. 웨스트윙에서 쓰는 말 중에 ‘백악관 버블’이 있다. 대통령이 갈수록 투명한 거품 속에, 하얀 감옥에서 고립돼 가는 딜레마를 말한다. 보좌진의 고민이 버블의 출구 찾기에 있는 건 당연하다. 버블 밖과의 소통을 통해 대통령의 심기 관리까지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 정치에선 모두가 화를 낸다. 한파 속에도 곳곳이 불타듯 뜨겁다. 본보 청와대 출입기자가 26일자로 보내온 기사의 첫 문장도 이렇게 시작한다. ‘새해 들어 박근혜 대통령의 공격정치가 격해지고 있다.’ 대통령이 화가 나 있고, 쟁점 사안들에 공격적인 정치로 대응하고 있다는 얘기다. 데스크로선 기사의 표현까지 격해 보였지만, 현장 기자가 출입처 분위기를 담아낸 것이니 고치지 않았다. 실제는 모르겠지만 외견상 대통령의 심기 관리가 안 되고 있는 건 사실로 보인다. 선거철에는 이성보다 감성이 유권자 마음을 흔들기는 하지만 그런 차원은 넘어선 듯하다.
‘대통령 리스크’란 말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통령의 행위, 말 하나하나는 정치적 해석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장관이 소리 질러야 할 때 대통령이 선을 긋고 나와 달리 방도를 찾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꼬여 있는 현안을 보면 대통령 발언의 톤이 세질 수밖에 없을 법하다. 누리과정 예산편성 갈등으로 일어난 보육대란, 쟁점 법안들을 둘러싼 여야 대치, 4차 북핵 실험 이후 중국의 대북제재 문제 등 하나같이 풀리지 않는 현안들뿐이다.
그렇다고 화를 낸다고 풀리는 일들이 아니다. 대통령의 발언은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공개된 순간 대내외 정책이 된다. 한데 간접화법이 필요한 외교에서도 직설적이고 조율되지 않은 발언이 나와 ‘리스크’가 되는 것이다. 22일 대통령의 6자회담 무용론과 5자회담 제안은 즉각 우리 외교의 과제가 되어야 했다. 비록 미국이 ‘한국 국내용’인 주한 미국대사관 성명을 내 역시 동맹임을 과시한 게 성과의 전부였지만 말이다. 현실은 냉정하고 그걸 바꾸기란 쉽지 않다. 진정한 정치에는 적절히 정객과 정치가의 면모가 배합되어야 한다는 주문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남북문제만 해도, 남쪽에서 보면 평양의 지도자는 의심스런 30대다. 경험도 없고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기고 만장하니 더 그렇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그를 머리에 이고 사는 형국이다. 그가 닮으려 하는 할아버지 김일성은 30대 후반에 무모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그런 김정은이 손에 든 핵무기를, 천년 역사의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우르반의 거포에 비유한 여당 최고위원의 우려는 틀리지 않는다. 난공불락의 요새 콘스탄티노플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우르반 거포를 앞세워 공격해온 오스만투르크의 혈기왕성한 20대 메메드2세 앞에서 무너졌다. 그런 김정은에게 대화보다는 제재, 회초리만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은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1년, 한국은 2년 남은 정부에 불과하다. 이제 나이 30대 초반, 정권이 조금 더 안정되면 앞으로 30년은 더 권좌를 누릴 수 있다. 그러니 시간은 그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5년짜리 한국 정권은 앞으로 여섯 번, 4년인 미국 정권은 그보다 더 많이 상대할 수도 있다. 그로선 굳이 시간에 쫓기는 지금 정권들에게 업적을 만들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지도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한쪽은 오로지 현재만 보고, 다른 한쪽은 과거 세계에만 머물며 극단의 위치만 지키다 보면 모든 게 상대방 탓으로 보일 뿐이다. 미드필드로 나와 타협하거나 만나지 않는 이상 서로 기대할 게 없는 것이다. 지금의 지도자들이 나중에 회고록을 쓸 때 현재의 기록들은 지도자의 실패와 성공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다.
이태규 정치부장 tg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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