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초상’을 연극으로 그리는 중이다. 어렵다. 한국인을 정의하는 것부터가 어렵다. 딴 나라에 사는 교포도 있고 우리나라에 시집 온 딴 나라 처자도 있다. 아덴만의 청해부대, 남극의 세종기지, 강남의 유한마담, 마늘 껍질을 까느라 등이 굽은 재래시장 할머니도 있다. 직업만 해도 2014년 통계로 1만개가 넘는다.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내성적, 다혈질, 꼼꼼함 등의 캐릭터를 부여하고 나이와 성별, 사는 형편과 과거의 트라우마까지 염두를 하면 복잡해도 보통 복잡한 게 아니다. 복잡하면 가짜가 되고 연극이 실패할 확률도 덩달아 높아진다.
집단창작을 해보자는 결론이 났다. 여럿이 논의를 해서 주제를 좁혀 이야기를 풀다 보면 윤곽도 그려지고 그 나름의 명분도 생겨날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원형의 주인공과 반원형의 조연, 평면의 단역들로 직조가 되어야 정해진 시간 안에 끝을 낼 수가 있다. 공동창작은 이런 계산이 잘 안 선다. 열 명이 넘는 개성 넘치는 배우들이 모여 이런저런 상황을 설정하고 말과 행동을 쏟아내다 보면 곧장 산으로 간다. 모두가 입체를 가지고 연기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자는 건지, 어디로 흘러가겠다는 건지 중구난방이다. 게다가 이야기를 여닫기도 쉽지가 않다. 어허 이런 낭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창작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카오스를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혼돈 속에서 하나의 맥락을 잡아낼 수만 있다면 이야말로 멋진 작업이 아니랴. 또 그 맥락을 보여주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또한 우리 한국인의 맥락일 수 있지 않겠나. 그래 믿고 가보자. 하다 보면 방향도 잡히고 요령도 생기리라. 우여곡절은 여전했다. 그러나 배우들이 서로 친해지고 익숙해지자 깊이가 있는 이야기도 더러 만들어지고 있다. 스릴 넘치는 작업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러던 중에 깨달은 놀라운 사실이 있다. 사람이 나무였다!
나무는 뿌리를 내려야 산다. 사람도 그랬다.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그 사람의 정체가 보이지를 않았다. 아무리 즉흥극을 해도 그이가 무슨 뜻과 감정으로 행동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둥둥 떠다니는 비닐봉지와 같다고 할까. 하지만 일단 뿌리를 내리고 나면 그의 존재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설득력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가자 모두가 뿌리를 내리는 순간부터는 그야말로 극이 볼만해졌고 납득도 되었다. 아무리 많은 말과 행동을 쏟아내도 그의 자아가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상황은 금세 생기를 잃었고 억지스러워졌다. 당황한 나머지 어느 순간 뿌리가 뽑혀 부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김없이 즉흥극은 맥락을 놓쳤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나무였다. 뿌리를 뽑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다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를 부딪쳐 소리를 냈고 부러지지 않으려고 알아서 휘었다. 먹고 살기가 팍팍하면 앙상해졌고 좀 산다 싶으면 무성한 가지를 뻗쳐 주변의 키 작은 나무를 못살게 굴었다. 병들어 죽어가기도 하고 이미 고목이 되었으나 꿋꿋이 버텨 새순을 움터내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도리어 곰팡이가 창궐한 못생긴 나무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 모든 나무가 제 자리를 지키며 영욕을 견디더라는.
과연 나무들끼리 싸워서 상대의 뿌리마저도 뽑을 수가 있을까.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런 바보 같은 시도가 왕왕 일어난다. 나무가 나무를 뽑으려고 흔들면서 득의양양해 한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밑동마저 자르려 한다. 어찌 자기만 멀쩡할 수 있나. 자기는 특출 난 나무라서 아무 나무고 마구 벌목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것 참 괴상한 나무 아닌가. 모두가 나무일진대 누가 누구의 뿌리를 함부로 뽑고 벨 수 있으랴. 기껏해야 그 자신도 한 그루의 나무다. 인정하시라. 숲에서 사는 고작 한 그루의 나무일 따름이다.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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