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창설자인 배우 레드포드
“우리는 언제나 다양성 유지” 역설
올해 1만2000편 응모… 195편 상영
카이약 감독 ‘위 아 X’ 본 건 행운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얘기 담은
英다큐 ‘연인과 전제군주’도 인기
당초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영하 15℃는 훌쩍 넘길 거라고 봤다. 특히 영화제가 열리는 파크시티는 스키장 활강 코스가 있는 만큼 더 할 거라고 봤다. 그러나 그다지 춥지가 않다. 영하 6℃ 정도? 9년 전쯤 하정우 주연의 ‘두 번째 사랑’을 취재하러 미국 여배우 베라 파미가 등을 만나러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온난화와 이상기온 탓이다. 호텔이 있는 솔트레이크시는 거의 늦가을 날씨를 방불케 할 정도다. 서울이 낮에도 영하 15도를 오간다는데 추운 곳으로 추위를 피하러 온 셈이 됐다.
올해로 32회째를 맞는 선댄스영화제는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파크시티에서 열린다. 미국 최대의 독립영화제라 불리지만 이제는 ‘인디펜던트’의 의미보다는 비(非) 할리우드의 의미가 더 강하게 담긴 행사가 됐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대규모 영화제로서는 한 해 가장 먼저 열리는 영화제로 올해는 지난 21일 막을 올려 31일까지 계속된다. 상영 편수는 195편(단편 포함)이며 상영 횟수는 900회에 가량이다. 상영관은 솔트레이크시 5개 관을 포함해 모두 16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출품 응모 작 수다. 올해 120개국 12,793편이 응모했으니 이 영화제에 쏠리는 새로운 영화작가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만하다. 지난해 영화제 참가자는 4만6,000명 이상이며 유타주에 미친 경제효과는 8,340만달러(약 1,001억원)다. 지난해 국내에서 150만 관객을 동원한 ‘위플래쉬’와 ‘보이후드’, ‘저수지의 개들’이 소개된 이곳으로 각국 영화업자들이 몰리나 정작 영화마켓은 없다. 영화를 본 뒤 일일이 관계자와 연락한 뒤 영화를 구매하는 식으로 거래가 이뤄진다. 참가비는 850~3,000달러(약 102만~306만원)로 칸국제영화제의 마켓 참여 비용보다 비싸다.
이 영화제의 상징이자 수장 격인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는 개막식 연설에서 우리의 가슴에도 비장하게 꽂히는 말을 했다. 그는 “선댄스영화제는 언제나 다양성을 유지해 왔으며 이 영화제가 독립영화다운 다양성이 결여돼 간다는 비판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양성은 어디에서든 화두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레드포드가 1936년생이니 올해 만 80세. 예전의 그 잘생긴 얼굴을 찾기 힘들지만 기품 있는 외모는 여전하다.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그냥 멋있다. 그것도 무지하게.
레드포드는 이 영화제를 만들면서 자신의 출연작 가운데 가장 아끼는 영화이자 자신을 세계적 스타로 만든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이름을 따 왔다. 1969년 조지 로이 힐 감독이 만들어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기수 격으로 평가 받아 온 이 영화의 영어 원제는 ‘Butch Cassidy and Subdance Kid’이다. 레드포드는 총잡이 선댄스 키드 역을 맡았으며 그래서 이 영화제의 이름이 ‘선댄스’가 됐다. 선댄스영화제는 로버트 레드포드 영화제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이 영화제에서 아무런 직함을 맡고 있지 않다. 처음부터 그는 영화제의 창시자이자 후원자로 머물렀을 뿐 어떠한 권한도 행사하지 않아 오히려 더욱 더 든든한 방벽이 돼 왔다. 현재 선댄스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은 존 쿠거다.
왜 레드포드는 딴 곳도 아니고 여기 이 외진 곳인 유타의 파크시티에서 영화제를 열 생각을 했을까. 얘기는 32년 전으로 돌아간다. 파크시티는 여유 있는 은퇴자들, 특히 60~70년대의 새로운 문화사조에 대한 학습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조성된 ‘동네’다. 이들은 미국에서도 (프랑스 감독)장 뤽 고다르 류의 새로운 영화들을 볼 수 있기를 갈망하던 끝에 조그만 영화제(‘US영화제’)를 열게 됐는데, 늘 그렇지만 사람을 모으기도, 작품을 모으기도, 무엇보다 영화제를 운영하는 재원을 모으기도 어렵던 차에 마침 레드포드가 근처에 목장을 산 것이 이들에게는 기회가 됐다. 이들의 얘기를 들은 레드포드는 단순히 기금을 후원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영화제를 사서 이름까지 바꾸고 지금의 선댄스영화제로 키워 냈다. 그러니까 애초에 레드포드가 어마어마한 야심을 가지고 이 영화제를 기획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사람의 이름 값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무엇보다 그 이름이 30년 넘는 동안 자기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케 한다.
지난 3일 동안 본 몇몇 작품들로 가늠해 봤을 때 올해는 데이비드 린치 류의 유명 감독이 연출하거나 스타가 줄줄이 출연하는 영화들이 그리 많지가 않다. 예산이 큰 영화들도 거의 없다. 이 말은 곧, 오히려 선댄스가 추구하는 ‘디스커버리 페스티벌(discovery festival)’(좋은 작품을 찾아내는 영화제)의 취지에 딱 맞는 해라는 얘기가 된다. 올해 선댄스가 진짜 선댄스라는 말이다.
특히 월드 시네마 다큐멘터리 경쟁 섹션에 나온 스티븐 카이약 감독의 ‘위 아 X’를 본 건 행운이었다. 일본의 전설적인 록그룹 X재팬의 리더 요시키를 다룬 내용이다.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을 모은 넥스트 섹션의 ‘내 엄마의 눈’은 살인, 감금, 사육, 근친 등 온갖 엽기적 상상은 다 모아 놓은 듯한 작품이어서 관객들 일부가 실소를 터뜨리며 나가긴 했지만 역설적으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미국 드라마 경쟁 섹션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안토니오 캄포스 감독, 레베카 홀 주연의 ‘크리스틴’은 1974년 한 지방방송국 여기자가 생방송 도중 권총 자살을 기도한 실제 사건을 그린 내용이다. 다소 지나치게 미국적이어서 이 영화가 한국 관객들에게 보여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레베카 밀러 감독이 만든 ‘매기의 계획’은 그레다 거윅과 줄리앤 무어, 이던 호크가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소니 클래식 배급 작품이니 국내에서도 개봉될 공산이 크다. 거윅의 영화인 만큼 통통 튀는 매력이 있다. 중국 야오 후앙 감독의 ‘플레져. 러브’는 어떻게 선댄스에 왔는지 그 경로가 의심되는 작품이긴 했다. 이현승 감독의 ‘시월애’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중국 영화가 변하고 있긴 하지만 감성적으로는 아직 세계 관객을 휘어잡기에 역부족이지 않을까 싶었다. ‘원스’와 ‘비긴 어게인’의 감독인 존 카니의 신작 ‘싱 스트리트’를 보는 일은 언감생심, 티켓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얘기를 담은 영국 다큐멘터리 ‘연인과 전제군주’ 역시 관객들이 넘쳐 난다. 북한 관련 얘기는 선댄스 관객들에게도 관심권 최우선순위임을 보여 준다.
이렇게 많은 영화들이 넘쳐 나건만 현재 선댄스영화제에는 한국 영화인들이 거의 없다. 아예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어쩌면 그건, 한국 영화계의 다양성이 그 만큼 수직으로 하락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믿거나 말거나 지만 꽤나 그럴 듯한 얘기일 수 있겠다. 지금 솔트 레이크에는 눈이 내린다.
파크시티=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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