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 4시 30분, 서울 동작구의 한 사립 유치원. 평소 같으면 오후 수업을 끝내고 교사들이 다소 가벼워 진 마음으로 행정 업무를 시작할 시간이었지만, 이날은 원장과 교사 10여 명이 어두운 표정으로 회의실에 둘러 앉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김모(58) 원장이 “누리과정 예산 지원금이 끊겨 오늘로 예정된 월급을 당분간 줄 수 없게 됐다”며 “어떻게든 방도를 마련해볼 테니 믿고 기다려 달라”는 얘기를 꺼내자 수심 가득한 표정을 짓던 교사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유치원에서 12년째 재직 중인 A교사는 “손 쓸 도리 없이 연체 될 카드 대금과 대출 이자만 생각하면 가슴이 콱 막혀 온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200만원이 조금 넘는 A교사의 월급은 이달 말 주택담보대출 이자와 카드 대금, 아이들 교육비로 차례로 자동 납부될 예정이었다. A교사는 “최근 집을 장만해 중소기업 연구직인 남편과 내가 겨우 대출 이자를 갚아나가고 있었다”며 “이달 말까지 월급이 들어오지 않으면 아이들 학원을 끊거나 빚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호소했다. A 교사는 “부모님과 독립해 혼자 월세와 통신비, 카드대금을 모두 충당하고 있는 동료 교사들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고 있다”고 덧붙이며 뒤숭숭한 유치원의 분위기를 전했다. 대다수 사립 유치원의 월급 지급일인 25일까지도 누리과정 예산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치원 예산이 한 푼도 편성되지 않은 서울, 경기, 전남, 광주 지역의 대다수 유치원들에서는 교사 월급 지급이 중단됐다. 지난 해에도 누리과정 예산편성을 둘러싸고 중앙정부와 교육청간 갈등이 있었지만, 예산이 편성되지 않아 월급이 끊긴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 교사들의 동요는 극도에 달한 상태다. 보육대란의 최대 피해자이지만 하소연할 곳이 마땅치 않은 점도 교사들의 막막함을 더한다. 서울 서대문구 사립유치원의 한 교사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원장님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원장님이라고 해서 마땅히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닐 것”이라며 “기다려 달라는 원장님의 말을 믿고 있지만 못 받게 될 경우 어디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이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전날 교원처우개선비 2개월 분을 앞당겨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언발의 오줌 누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한 교사는 “서울시교육청에서 미리 지급키로 한 교사 처우 개선비도 1인당 100만원, 그것도 담임 교사와 원감에게만 지급하는 돈이라 전체 교사들의 ‘급한 불’을 끄기에 역부족”이라며 “정치 싸움에 교사들과 아이들만 희생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원장들은 원장들대로 하루하루 속이 타 들어가는 심정이다. 서울 종로구 한아름유치원 임지연(46) 원장은 “이 달 30일까지 정부나 교육청에서 해결해 주지 않으면 있는 돈을 모두 긁어서라도 월급을 지급해 교사들 어려움을 덜어줄 생각”이라면서도 “한파 때문에 운영비도 평소의 두 배 가까이 나오는데 운영비를 모두 긁어 월급을 주고 나면 2월 유치원은 무슨 방도로 운영할지 모르겠다”고 울상을 지었다. 경기 수원시의 한 사립 유치원 김모(48) 원장도 “말일까지 해결이 안 되면 일단 빌려서라도 교사들 급여는 줄 것”이라며 “그만 두는 원아도 속출해 교사들은 월급뿐 아니라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 날 폭설로 휴원한 광주시내 유치원의 원장과 교사 600여 명이 광주시의회 의장실 앞에서 “정부와 교육청 싸움에 유치원만 피해를 보고 있다”며 누리과정 예산 편성을 주장하는 농성을 벌였다.
유명식기자 gija@hankookilbo.com
김민정기자 fact@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