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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엔트공의회 승인 칙서가 발표되다

입력
2016.01.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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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월 26일

트리엔트공의회 풍경. 루터 종교개혁 이후 혼란스러워진 교리와 의식을 재정립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했지만, 개신교와의 화해할 수 없는 선을 긋는 결과를 낳았다.
트리엔트공의회 풍경. 루터 종교개혁 이후 혼란스러워진 교리와 의식을 재정립하고 교회 규율을 혁신했지만, 개신교와의 화해할 수 없는 선을 긋는 결과를 낳았다.

라틴어로 콘실리움(Concilium)이라 부르는 공의회는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교리와 의식 등 근원적인 문제를 논의해 정하는 세기의 종교회의다. 공의회는 325년 니케아공의회 이래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타 종교와의 공존 원칙 천명)까지 모두 21차례 열렸고, 대부분 1년 이내 끝이 났다.

마틴 루터 종교개혁으로 전 유럽이 요동치던 16세기 중반의 트리엔트공의회(19번째)는 장장 18년(1545~1563년) 동안 3기에 걸쳐 진행된 최장기 회의로 회기 도중 바오로3세와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까지 교황 4명이 서거했다. 1564년 1월 26일은 후임 비오4세가 공의회 결정을 승인하는 칙서를 발표한 날이다.

1517년 루터가 95조 반박문을 발표했고, 21년 레오 10세는 그를 파문했다. 유럽 교회, 나아가 기독교적 보편성에 근거한 중세 유럽의 동질성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황제파와의 대립도 첨예해져 갔다. 트리엔트공의회는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열렸지만, 개신교파 제후들의 거부 등으로 소집서부터 진통이 컸다. 교리와 전례, 상서 등에 대한 논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받들며 교회 권위를 부정하려던 프로테스탄트에 반해 공의회는 성서와 성전을 신앙의 원천으로 재확인했다.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vulgate)’를 공식 성서로 선포함으로써 루터 번역성서를 배격했고, 성서 해석에 대한 교황과 교회의 독점적 권위를 재확인했다. 루터 예정설과 믿음에 의한 면죄설을 이단적 신앙으로 규정했고, 프로테스탄트의 사제 독신제 폐지 요구도 거부되었다. 교황 칙서는 유럽 재통합이라는 의도와 달리 가톨릭과 개신교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칼날이었고, 성바로톨로메오 축일의 위그노 학살(1572년)과 독일 30년전쟁(1618~1648)의 피를 불렀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부분. 중앙의 예수를 비롯한 성인들의 성기부분이 교황 칙령에 따라 천으로 가려졌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부분. 중앙의 예수를 비롯한 성인들의 성기부분이 교황 칙령에 따라 천으로 가려졌다.

회의는 미켈란젤로(1475~1564)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 ‘최후의 심판’속 예수와 성인들의 성기를 가리게 한 회의이기도 했다. 성화ㆍ성상을 우상 숭배로 여긴 프로테스탄트와 달리 가톨릭은 문맹 신자를 위해 6세기 시작된 성화 전통을 존중했다. 대신 규율을 위해 그림의 신성성을 엄히 했고 시범케이스로 ‘최후의 심판(1541년 공개)’을 찍어 “비속한 부분”을 가리도록 명했다. 20여 일 뒤인 2월 18일 별세한 88세의 미켈란젤로가 그 칙령을 전해 들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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