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이 한파와 폭설로 뒤덮였다. 전국 곳곳에 많은 양의 눈이 내려 피해가 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특히 제주에 최고 적설량 150cm에 가까운 기록적 폭설이 내렸다고 했다. 무엇보다 제주공항 항공기가 전면 결항 되었다는 소식이 중요하게 보도되었다. TV 뉴스 화면은 눈 덮인 빈 활주로와 승객들로 북새통을 이룬 공항대합실의 모습을 번갈아 비춰주었다. 항공편으로 제주를 찾았다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발이 묶인 관광객 숫자가 수 만 명에 달한다고 기자가 말했다.
연말 세웠던 여행 계획이 중간에 어그러지지 않았다면, 나 역시 지난 주말 그 섬에 있었을 수도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하마터면 큰 고생할 뻔 했다는 말을 삼킨 게 사실이다. 부모님과 어린 아이들도 함께였을 테니 더욱 그랬다. 지금 저기에도 연로한 분들과 아기들이 있을 텐데 어쩌나 하는 걱정이 연이어 떠올라 화면을 지켜보는 마음이 더 착잡하고 심란했다. 오래 전, 고속도로에서 눈 속에 갇혔던 적이 있었다. 부산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예고 없는 폭설을 만난 것이다. 이름도 잊은 작은 출구로 간신히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천신만고 끝에 파출소를 찾아갔고 파출소 앞마당에 차를 세워놓은 채로 눈보라 속을 걸어 근처 숙소를 찾아 헤맸었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일요일 낮, 밖은 여전히 꽁꽁 얼어 있고, 인터넷 포털의 뉴스란에는 제주공항의 소식이 거의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현재 제주에 있거나 그곳의 지인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들이 속속 댓글을 달아 현장의 절박한 분위기를 한층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랬다더라’는 글도 꽤 보였는데,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공항직원들에게 거칠게 항의하다 큰일로 이어질 뻔 했다는데 왜 보도해주는 언론사가 없느냐는 댓글의 추천수가 아주 많았다. 공항주변 도로의 결빙으로 많은 분들이 밤새 꼼짝 못한 채 갇혀서 추위에 덜덜 떨며 노숙을 했다는 기사 밑에는 이런 분들에게 종이상자 한 장을 만원에 판매하는 나쁜 사람도 있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러자 어려움에 처한 외지인을 돕지는 못할망정 바가지를 씌웠다며 각박한 세태를 개탄하는 댓글들이 줄줄이 달렸다. 나 또한 라면상자 같은 걸 떠올리고는 이게 사실이라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트위터에서 누군가 리트윗한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제주도 폭설에 관한 뉴스가 왜 죄다 항공편뿐이냐는, 한 제주도민의 목소리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주도는 관광객만의 섬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주는, 외지인에게는 휴양지이거나 관광지이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제주도민의 생활터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엄청난 눈 때문에 제주에는 길이 끊긴 곳이 많고, 물이나 전기가 끊긴 곳도 많다고 했다. 제주의 특수한 지리 상황을 떠올리니 피해는 짐작보다 더 클게 분명했다. 눈에 고립되어 있는 가구 수도 적지 않을 터인데, 미디어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속보로 전하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전하지 않으니 타지에 있는 이에게는 마치 ‘없는 일’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 ‘폭리의 상자’ 정체도 곧 밝혀졌다. 알고 보니 원래 정가가 1만원인 공항에서 정식 판매하는 수하물박스가 있고, 그것을 사서 보온용으로 사용한 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전하는 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뉘앙스로 발언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전해진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민들의 진심을 알게 된 것은 페이스북의 한 페이지를 통해서다. ‘공항에서 5분거리 xx동입니다. 방 두 개 비어있고 온수 나옵니다.’ ‘공항에서 10분입니다. 식사제공해드릴게요. 어린아이 있는 가족 연락주세요.’
제주공항 근처에 사는 여러 제주도민들이 개인 연락처와 실명을 기꺼이 밝히며, 공항에서 노숙 중인 외지인들을 도우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폭설 속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내밀 수 있는 가장 따듯한 손이었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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