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집에 맡겨두었던 책들을 가져왔다. 맡길 당시엔 다시 찾을 일 없을 거라 여겼었다. 책이 가득 꽂혀 있는 공간에선 약간의 밀폐공포가 생기는 탓이다. 책등에 적힌 제목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강요 받는 듯한 압박감. 그래서 이사할 때마다 책들을 대량 처분하곤 했다. 그랬는데, 뭔가 되새기고 싶은 책들이 떠올라 작심하고 일부분이나마 도로 가져왔다. 때가 꼬질꼬질하고 담뱃진에 누렇게 얼룩진 책들. 길게는 20년 넘게 안 버리고 있는 것들도 있다. 문득, 까맣게 잊고 있다 우연히 마주쳐 누구였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사람을 만난 것도 같다. 분명 아는 사람이지만, 이제는 내 삶과는 별 상관없는 사람. 그러다가도 책장을 훑으면 그걸 읽던 당시의 정황이 부지불식 선명해진다. 파기되었던 기억이 그렇게 살아난다. 지금 당장 필요함에도 미처 떠오르지 않아 하지 못했던 말들. 그런 것들이 낡고 헤진 책장 속에 이미 다 쓰여 있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잃어버렸던 강아지라도 다시 찾은 듯 낡은 책갈피들을 이래저래 쓰다듬어본다. 안으로 삭이고 가다듬었던 내 말의 원류를 다시 만난 기분. 진짜 새로운 말이란 외부를 현혹하는 온갖 교언과 허식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놓아버린 자신의 분명한 과거 속에 있는 건지 모른다. 옛 책들을 본다. 잃어버렸던 나, 다시 만나게 될 내가 거기 가득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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