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생활 속 학대ㆍ방임’ 설문조사
글 모르는 자녀와 성인영화 시청 등
응답자들 평균 정답률 65%에 그쳐
언어, 정서적 폭력도 아동학대 해당
전문가들 “성장 발달에 악영향” 지적
자녀 꾸짖기 전 명확한 규칙 정하고
실제 훈육법에 적용하려고 노력해야
“부부 동반 모임이 있는데 2세 자녀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어 미성년자 출입금지인 호프집에 데려갔다. 학대일까 아닐까.”
임신 중인 이모(26)씨는 24일 이 같은 물음에 “아이가 말도 못하는데 그 정도는 괜찮다고 본다”고 답했다. 학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육 전문가들은 이런 행위도 “학대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충격을 표현하지 못하는 연령대의 아이들일수록 주변 환경을 흡수ㆍ기억하는 시간이 훨씬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도 아동학대일 수 있습니다
※학부모 및 시민 114명 대상 설문. 응답률은 응답자가 예시를 학대ㆍ방임이라고 답한 비율.
인천 여아 학대와 부천 남아 시신 훼손 사건을 계기로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폭력만이 학대는 아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지나치는 언어ㆍ정서적 폭력과 방임 등 간접 학대도 아이들의 성장 발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일보가 학부모 및 일반 시민 114명을 대상으로 전문가들이 ‘생활 속 학대 또는 방임’이라고 보고 있는 11개 사례에 대해 OX 퀴즈 형식의 설문을 진행한 결과, 평균 정답률은 65.3%로 나타났다. 응답자들이 평균적으로 10개 사례 중 4개 정도는 학대가 아니라고 답했다는 의미다. 아동학대를 대하는 인식 수준은 과거에 비해 높아졌다는 평가이나 실제 훈육법과는 괴리를 보여 생활 속 실천이 시급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문가들이 꼽은 아동학대 예시 사례는 ▦학원을 과도하게 보내 수면 시간을 줄인 경우 ▦부모 지갑에 몰래 손댄 아이를 훈육 목적으로 집밖으로 내쫓은 경우 ▦맞벌이 부모가 아이에게 밥을 사먹게 했다가 아이 건강이 악화된 경우 등 주변에서 자주 볼 법한 일들이다.
이런 예시 사례를 질문한 결과 “유치원을 싫어하는 자녀가 밥을 먹지 않을 때마다 ‘밥 안 먹으면 유치원 보내겠다’”고 압박한 사례의 경우 이를 학대로 응답한 비율은 40.4%에 불과했다. 자녀가 글을 모른다고 한글 자막이 나오는 외국 성인영화를 함께 시청하거나(56.1%), 식사를 거부하는 아이에게 밥을 빼앗고 가족의 식사를 구경하게 하는(57.8%) 등의 학대 사례도 정답률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배근 한국아동학대예방협회장은 “밥을 거부한다고 싫어하는 유치원 등원을 조건으로 반복적인 협박을 하다 보면 아이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정서적 퇴행을 불러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밥을 빼앗는 훈육법 역시 ‘명백한 정서 학대’로 규정됐다. 이미정 여주대 보육학과 교수는 “아이들은 누구나 주도권을 잡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때 타당한 규칙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밥그릇을 치우는 것은 선택권을 박탈하는 ‘정서 학대’의 유형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아동학대를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이는 여론은 어느 정도 형성됐다고 진단한다. 떼 쓰는 아이를 홀로 격리 시킨 경우(정답률 76.6%)나 떼쓰는 유치원생을 화장실에 잠시 가둔 경우(86.0%)처럼 눈에 보이는 폭력이 수반되지 않더라도 잘못으로 인식하는 답변이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연 이런 생각들이 실제 훈육현장에 적용되고 있느냐다. 11개 항목을 모두 학대라고 응답한 박모(54ㆍ여)씨도 “사실 1남 1녀를 키우면서 화가 나 나와 남편이 일상적으로 한 말과 행동이 예시에 있었다”며 “우리도 부모세대로부터 훈육법을 답습한 탓에 아예 학대로 여기지 않을 때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차모(39ㆍ여)씨는 “교육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엄격해져야 하는 부분이 있어 머리로 아는 훈육의 잣대를 일일이 실생활에 반영하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설문에 응한 대상자 중 교사 출신 여성 1명을 제외한 모든 응답자(113명)가 예시 문항 중 하나라도 자녀에게 해봤거나 어린 시절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할 정도로 괴리는 컸다.
김정미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사업본부장은 “최근 아동학대 사건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라며 “부모는 자녀를 꾸짖기 전에 명확한 규칙을 미리 알려줬는지, 적절한 선택권을 부여했는지 등을 항상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
양진하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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