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3월 16일 하오 2시 20분, 김홍섭은 향년 51세를 일기로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밖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평생을 되돌아보니 내가 지은 죄가 참으로 많았다.” 해방이후 20년 가량 그는 판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며 세상 사람들의 죄를 다스려왔다. 허나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도 죄 많은 사람일 뿐이라는 고백이었다. 죽음에 임하는 서울고등법원장 김홍섭의 겸허한 태도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일제강점기 그는 전북 김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규교육이라곤 4년제 원평보통학교(초등학교)를 마쳤을 뿐이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할 수 없어 독학으로 중등학교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쿄에 소재한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에 유학했다. 그런데 유학을 떠난 지 불과 일 년여 만에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1940년).
귀국한 김홍섭을 부른 이는 법조계의 대선배 김병로(1887-1964)였다. 김병로는 자신의 비좁은 변호사사무실을 함께 나누어 쓰자고 제의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끝까지 서로에게 굳은 신의를 지키며 살았다. 격동과 혼란, 굴욕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그들은 법률가로서 소신과 양심을 지켜냈다.
1996년 문화방송국이 300여 명의 법조계 중진들에게 물었다. ‘가장 존경하는 선배 법관은 누구인가?’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는 첫째가 사법부의 독립을 지킨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요, 둘째는 청렴과 양심의 상징 김홍섭 판사였다. 우연이 아니었다. ‘대쪽 검사’로 이름난 최대교(1901-1992)가 세 번째였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들 3인을 “법조3성(法曹三聖)”이라 일컫는다.
법조인이 되고 싶지 않았던 김홍섭
소년시절 김홍섭은 ‘소공자’라는 동화를 탐독하였다. 거기에 등장하는 영국 변호사 해비셤은 그가 생애 최초로 알게 된 법조인이었다. 해비셤은 “통통하고, 짧고, 몽실몽실한 손가락”의 소유자였다. 소년 김홍섭은 이런 표현이 무엇을 상징하는 지를 그때 벌써 눈치 챘다. ‘법조인은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다. 그 가운데는 법의 위세를 빌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속물적 인간형이 많은 모양.’ 소년은 결코 그런 법조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 저들의 통치가 더욱 강압적으로 변해가자 청년 김홍섭의 생각이 바뀌었다. “변호사가 되고 싶다. 이 군국주의자들의 침략 앞에서 나 자신의 신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다.” 해방 뒤 그는 “보신(保身)”을 목적으로 법률공부에 매달렸다고 고백했다. 그 일을 회상하며 “법률, 너와 나는 부자연스럽게 결합된 사이였다”고도 서술하기도 했다. 김홍섭은 당시의 “법률은 악법이 대부분이었다”고 단언했다. 그런 그였기에 변호사 노릇이 내키지도 않았고, 억지 변호를 통해 “돈을 벌만큼 강심장이 되지도 못하였다”.
1945년 일제가 물러가자 김홍섭은 법조계를 떠날 생각이었다. “법률 또는 법조인에게는 더러운 세상과 타협하기 좋아하는 속성이 있다.” 소싯적부터 그는 줄곧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이직을 서둘렀지만, 주변사람들의 반대가 완강하였다. “이제 국권이 우리 한국인의 책임 아래 있지 않소. 당신과 같은 전문가들이 더욱 수고하여야 할 때가 지금이요.” 이 말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난한 김홍섭으로서는 생계를 이을 다른 방법도 없었다.
번민 끝에 김홍섭은 법조계에 남았다. 마음을 고쳐 그렇게 결정한 이상, 그는 악덕과 불의를 추방하는데 진력하기로 다짐했다. 수년 뒤 그는 형사사건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판사가 되었다. 이권과 재산 문제 등을 주로 다루는 민사사건은 아예 관심 밖이었다.
간사한 저 모리배들을 어찌할까
나라가 해방되자 과거의 친일파들은 자중하는 듯했다. 그들은 생업 전선에서 물러나 세상의 추이를 주시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았다. 그들은 “본연의 외세 의존적 촉수를 드러내며” 세상의 중심으로 다시 진출하였다. 해방공간의 국내사정을 날카롭게 파헤친 어느 글에서 김홍섭은 사태를 냉철하게 인식했다. 그가 주목한 친일파 중에는 속내를 버젓이 드러내놓고 다음과 같이 공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대 일본총독치고 나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나와 친하지 않은 군사령관도 없었다. 이 땅이 미군치하인 이상 미국의 장군과 영관급 장교들에게 나는 얼마든지 접근할 자신이 있다. 만약 소련군 천하가 되더라도, 그 두목들과도 친근하게 지낼 자신이 있다.”
세상일은 정말 그런 식이 되어갔다. 친일파의 화려한 부활이 도처에서 목격되었다. 깊은 시름 속에서 김홍섭은 이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이런 악질 모리배들의 눈에는 국가라는 것이 마치 초대형 회사 같이 보이는 모양이다. 그들은 사업하는 재미로 국가를 동업자처럼 상대한다. 과연 국가란 소수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겉치레에 불과한 것인가?” 김홍섭의 눈에 비친 그들 친일파들은 새 나라의 운명을 위협하는 “악질 모리배”였던 것이다.
그들이 멋대로 날뛰는 세상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이른바 ‘혼’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출세와 부귀영화를 감히 꿈꾸기조차 어려운 세상이었다. 김홍섭이 판사라는 자신의 직업과 삶에 대해 끝없이 고뇌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씁쓸한 일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딱한 사정은 오십보백보가 아닐까.
‘사도법관’을 넘어서
그의 삶은 한 마디로 말해 선명하다 못해 투명하였다. 요즘처럼 물욕을 자랑처럼 떠벌리는 세상에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화를 그는 무척 많이 남겼다. 그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고위층이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잘못이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그 자신은 서울고등법원장 시절, 관용차를 청사에 세워두고 도보로 출퇴근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평생 촌지는 물론이고, 일체의 접대와 향응도 사절했다. 개인용도로는 법원의 편지봉투 한 장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 판사의 직무상 양복을 자주 입기는 했지만, 그가 몸에 걸친 것은 헐값에 산 중고품뿐이었다. 신발도 ‘비닐’로 구두흉내만 낸 것, 또는 검정고무신이 전부였다.
그 시절 한국사회는 가난에 신음하였으나 ‘사회지도층’의 부정부패는 도를 넘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김홍섭도 상당한 사치와 호사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사서 고생하는 바보’가 되기를 그는 바랐다. 그의 집무실 책상 위에는 항상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펼쳐져 있었다.
법관의 사명에 대한 이해 역시 남다른 점이 있었다. 피고인의 유죄여부를 따지는 것은 물론, 죄인의 영혼을 교화(敎化)하는 것도 법관의 책임이라고 그는 믿었다. 김홍섭은 틈을 내어 교도소를 방문했다. 특히 사형수들을 자주 찾았는데, 그 중에는 그의 인품과 정성에 감화된 이들이 많았다. 독재자 이승만의 심복으로 비리를 일삼던 특무대장 김창룡을 쏜 허태영 대령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독재정권은 김홍섭이 허태영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훗날 장면 전 총리는 그를 일컬어 ‘사도법관’ 즉, 그리스도의 사도(使徒)와도 같은 판사라고 했다. 김홍섭에게는 과연 수도자의 면모가 뚜렷했다. 그의 사상과 행적을 연구한 학자들이 그의 종교 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김홍섭은 사법부의 독립과 정의의 구현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는 점이다. 1946년 9월, 그는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담당검사였다. 좌우익의 대립이 치열했던 그때, 미군정은 수사와 재판에 노골적으로 간여하였다. 이에 맞서 김홍섭은 사법권의 독립을 주장하며 군정당국과 정면충돌했다. 나중에 제2공화국 시절에도 그는 집권층의 실정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권력의 독선과 오류를 지적함에 있어 그는 주저도 망설임도 없었다. 세월은 흘렀건마는 김홍섭 판사가 더욱 그리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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