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부르는 노동 환경

직장인 3명 중 2명 “업무시간 외 지시 받아”
일상 된 극한 스트레스, 퇴근 뒤 전화 금지 프랑스와 대조
사회복지사 25% “자살 충동” 서비스업 감정소모 위험 수위
OECD 최장 근로시간도 한몫… 긴장 못 풀어 생산성 떨어져

바쁘지만 허망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여전히 그 자리다. 노동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에 번아웃은 노동강도가 센 직장뿐 아니라 웬만한 업종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사회 현상이 됐다. 미국의 심리학자 크리스티나 매슬랙은 산업구조와 근로환경 변화로 번아웃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정서적 소진, 비인격화, 자아 성취감 저하를 원인으로 꼽았다.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적당한 업무량, 자율성과 권한, 보수와 인정, 조직 분위기와 동료애, 투명성과 공평함, 일의 가치와 의미 부여 등이 필수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장시간 근로와 고용의 질 악화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한국의 직장인은 관리조차 되지 않는 번아웃의 사각지대에 있는 셈이다.

서비스 업계에서 특히 취약

서비스업은 업무 강도는 세지만 보상은 적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해 특히 번아웃에 취약하다. 육체적 무리뿐 아니라 인격무시, 욕설, 무리한 요구에 시달리다 보면 속병이 들 수밖에 없다. 2년 차 마트 계산원 D(45)씨는 고객 유모차에 담겨 있는 먹다 남은 과자와 생수병에 대해 물었다가 봉변을 당했다. 고객은 기분이 상했다며 언성을 높였고, 결국 D씨는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수모를 겪었다. 온 몸에 힘이 다 빠져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퇴근한 D씨는 수면장애에 출근도 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과 분노가 커져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고객응대 업무에 종사했던 콜센터 직원 C(34)씨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회사 내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5년을 근무한 베테랑이었지만 고객의 욕설과 폭언 등에 시달리면서 콜을 받다가 중간에 졸도하는 등 상태가 악화했다. 상담 치료까지 받았지만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사회복지공무원들은 격무와 직무 스트레스에 10명 중 4명이 번아웃 상태로 심리 상담을 필요로 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4명 중 1명꼴로 자살충동을 느꼈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2013년 약 6,000명을 설문한 결과로 중증도 우울상태가 23.7%(1,367명), 심한 우울 상태도 14.2%(822명)나 됐다. 윤진 중앙자살예방센터 팀장은 “자살 기도자나 위험한 수위에 있는 사람들을 상담하는 업무를 하다 보면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힘든 여건에서 분투하는 상담사나 사회복지사에게 번아웃 증상이 자주 나타난다”고 했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산재보상법 시행령ㆍ시행규칙 개정안을 통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만 산재 판정을 하다가 서비스 노동자의 우울증까지 범위를 넓혔다. 고객응대 업무를 맡고 있는 근로자의 정신질환 사례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24시간 대기, 직장인은 피곤하다
업무시간이 아닌데도 상사로부터 연락이 오는 상황을 최근 SNS에서 확산되고 있는 '가짜 잠금화면'으로 각색했다.

근로환경의 변화 가운데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것은 휴대전화다. 불시에 걸려오는 회사나 상사의 전화에 깜짝깜짝 놀라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정보통신기기에 의한 노동 인권 침해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3명 중 2명(63%)은 업무시간 외에도 모바일 메신저로 업무 연락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88%는 연락받은 즉시 그 업무를 처리했고, 60%는 다시 복귀했다고 답했다. 퇴근 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환경에 노출돼 온전히 쉴 수 없으니 정신 건강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업무 시간과 자유 시간이 엄격히 구별되지 않다 보니 일에 대한 집중력은 현격히 떨어진다. 직장인 상당수가 업무 시간에 개인 블로그를 하고 인터넷 쇼핑을 즐기는 등 이른바 딴짓을 하는 것도 결국 장시간 근로가 원인일 수 있다. 긴장을 오래 지속할 수 없어 이를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프랑스 경영자총연합회와 노동계는 퇴근시간인 오후 6시부터 다음날 9시 출근 때까지 업무와 연관된 전화나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을 금지했다. 여가 보장은 물론 온전한 휴식을 보장하는 게 근무시간 내 업무 효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한 합의였다.

가장 오래 일하는 한국, 고용 불안까지 ‘2중고’

은행원으로 3년간 일한 B(31)씨는 최근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일찍 출근해 은행 문을 열어야 하는 데다 3년 동안 정시에 퇴근한 적이 거의 없었다. B씨는 “솔직히 연봉도 괜찮고 다른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아 망설이긴 했다”며 “연차가 올라갈수록 실적 압박도 크고 무엇보다 야근이 일상화돼 주중에 나만의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점을 참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근로시간이 선진국 중 최장이라는 사실은 해묵은 이야기지만 개선될 여지는 없다. 2014년 한국 직장인의 노동시간도 연간 2,285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가장 길었다. OECD 평균(1,770시간)보다 515시간이나 초과했다. 독일(1,371시간)보다는 1.6배나 더 일해 날수로 따지면 114일이나 된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연장 근로시간 제한의 고용 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주 40시간인 법정 근로시간 외 연장근로 허용 시간(주 52시간)까지 초과한 노동자는 357만명이었다. 전체 노동자 5명 중 1명꼴이다.

장시간 근로가 업무효율을 높이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리지만 회사에 오래 남아 있는 게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후진적 시스템이 계속되고 있는 결과다. 정진주 사회건강연구소 소장도 “하루 8시간 노동으로 규정한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며 “장시간 근로로 긴장이 계속 지속될 경우 번아웃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라고 분석했다.

채지은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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