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아름다움
앤 카슨 지음·민승남 옮김
한겨레출판 발행·204쪽·1만1,000원
사랑은, 누구다 알다시피, 권력관계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라는, 토마스 만의 저 유명한 문장의 주어는 고작 열네 살인 소년 토니오 크뢰거다. 어떤 이성적 논증으로도, 혁명적 조처로도 전복되지 않는 사랑의 권력관계는 세상 모든 실연의 유일무이한 원인이며, 모든 존재의 내상에는 그 권력의 칼날이 새겨져 있다. 캐나다 시인 앤 카슨(66)이 2001년 발표한 ‘남편의 아름다움’은 사랑의 권력관계가 야기하는 이 슬픔을 처연하고 날카로운 언어로 그린 운문소설이다.
줄거리로 요약하자면, 간단하고도 진부한 이야기다. 15세의 라틴어 수업시간, 우연히 뒤돌아본 교실에 아름다움의 현현인 그가 있었다. 소녀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사귄다. 행복한 결혼생활이 1년쯤 지났을 때, 남편의 상투적 외도와 끝없는 거짓말이 시작되고, 여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왜 소녀 시절부터 우편으로 이혼 판결을 받은 늦은 중년의 나이까지/ 그를 사랑했느냐고?/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가 가까이 온다면/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은 확신을 준다.// …아름다움은 섹스를 섹스이게 한다.”
길고 짧은 스텝이 격렬하게 교차하는 탱고의 리듬을 빌어와 찢긴 꽃잎처럼 나부끼는 시소설의 언어는 그 자체로 ‘치명적이어서 절망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구현한다. 이 아름다움에는 도덕이나 선량 같은 가치미덕의 요소가 일절 반영되지 않으며, 내면의 미를 외면의 미로 변환하는 상상력 같은 것도 요구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자명한, 어떤 설명도 요구하지 않는 아름다움. “우리 사이엔 깊은 슬픔이 있고 그 슬픔은 너무도 습관적이라/ 나는 그걸 사랑과 구분할 수 없어// …당신은 나를 울려.”
박식과 파격이 시그니처인 작가는 그리스 고전 전문가답게 서사시와 시와 소설 사이에서 딱히 규정하기 어려운 형태로 존재하는 이 실연담에 다양한 신화의 인물과 에피소드들을 불러들인다.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지배력을 갖게 되는가?” “갈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책에서 가장 중요한 이 두 문장을 규명하기 위해 아름다움에 비루하게 복속된 여인은 페르세포네가 되어 하데스의 규칙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이아스에게 배신당한 후 자살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가 되기도 한다. 비극적 에로스로 점철된 동시에 “폐를 녹게 만드는 분노”로 폭발하는 텍스트는 남편이 화자가 되어 읊조리는 최후의 고백으로 반전을 맞을 때까지 빈번하게 아리고 저릿하다. “기다림이 그녀 안에서 똬리를 튼 채 앞발을 핥고 또 핥는다.”
완벽한 아름다움을 노래한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를 인용하며 각 장이 시작되는 이 허구의 시 속에서 ‘나’는 남편의 아름다움에 포획된 죄로 5,280편의 애가를 썼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내 안에서 쉭쉭거린다.” 하지만 “나는 죄가 없으므로 사죄하지 않는다.”
‘실연의 철학자’로 불리는 앤 카슨은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지만 노벨문학상 후보로 종종 거론되는 작가다. ‘남편의 아름다움’으로 여성 최초의 ‘T. S. 엘리엇상’ 수상자가 됐다.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가 활로 쏘아 죽인 빨강 괴물 게리온을 현대로 불러들여 그의 입장에서 다시 쓴 성장담 ‘빨강의 자서전’도 함께 번역됐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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