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의 역사
한스외르크 퀴스터 지음ㆍ송소민 옮김
서해문집 발행ㆍ337쪽ㆍ1만4,900원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곡물 등 재배식물 경작의 역사를 풀어낸 책이다. 저자 한스외르크 퀴스터는 독일 하노버의 라이프니츠대 식물지리학연구소의 식물생태학 교수다. 그는 식물학자답게 곡물을 서사의 주인공으로 삼는 것도 모자라 역사의 시원(始原)에 놨다. 만약 인류가 경작을 하지 않았다면 인류사도, 세계의 풍경도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생물학 연구자는 자신들의 연구 대상인 생물군이 단순히 존재 내지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더욱 강하게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그의 집필작업을 이끌었다. 가장 오래된 재배식물의 원산지는 서남아시아 저지대 건조지역을 둘러싼 ‘비옥한 초승달 지대’다. 인류는 여기서 밀, 보리, 콩 등 기초곡물을 싹 틔우고 정착생활을 도모한다.
논밭의 풍경이 다양해지기 시작한 건 중세 유럽. 농부가 아닌 이들도 수도원 정원 등에서 향신료 식물, 약초 등을 키우기 시작했다. 수도원 정원은 이 때문에 ‘살아있는 약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된 양파나, 현재까지 사랑 받는 시금치, 당근 등도 모두 유럽의 정원에서 주로 자랐다. 소위 신대륙 발견이 시작되면서부터는 토마토, 카카오, 담배 등 특히 다양한 재배식물이 유럽으로 확산됐다. 세계의 식탁이 비슷한 모습을 하기까지는 무역의 발달뿐 아니라 정원재배, 신대륙 발견을 통한 모종 전파 등이 한 몫 한 셈이다.
저자가 다루는 역사는 유기농법 논쟁, 곡물 재배의 폭발적 증가세, 바이오 에너지를 둘러싼 논란 등 최근 농업의 이슈까지 거슬러온다. 오늘날 인류는 슈퍼마켓을 통해 언제 어디서 누구나 원하는 작물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됐지만 모두가 행복해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점점 더 커지는 경작지에서 점점 더 적은 수의 농부가 경작한다. 많은 농부가 농업을 포기했다. 21세기 초 곡물 생산은 40년 전보다 약 두 배로 증가했다.”
저자는 곡물과 채소들의 시시콜콜한 특장성을 늘어놓고, 이들의 경작사, 이동사를 더듬어간다. 이 때문에 역사적 호기심으로 책을 집어 든 독자라면 적잖은 대목에서 다소 생경하거나 지루할 수 있겠다. 하지만 경작의 역사가 인류사를 어떻게 촉발시키고 휘감아왔는지를 한 흐름에 정리했다는 것은 장점이다.
무엇보다 그는 농업이 갈수록 전문화하긴 했지만 그럴수록 “나머지 사람들이 농업을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고 우려한다. 이는 역사를 통해 깨치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 등을 돌아보게 한다. 매년 자식 같은 쌀 가마니가 헐값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수년 째 이 땅 농부들의 숙명이 돼 버렸다. 뾰족한 수 없이 “일정량의 쌀 수입은 불가피” 방침을 되풀이 하는 정부는 ‘절대농지’ 해지라는 쉽지만 위험한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밥쌀 수입 개방 반대’를 외치다 경찰의 물대포에 스러진 백발의 농부는 여태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점점 늘어나는 인구가 먹을 수 있는 음식, 음식 공급의 안정성,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대단히 다양한 식품 등 매우 많은 일이 경작, 농경문화가 아니었으면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곡물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곡물에 모든 것이 달렸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렇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하나의 생각이 입을 맴돈다. “특정한 장소에 정주해 살아간 최초의 인류”인 농부에게 우리가 이럴 수는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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