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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를 합법화했던 1973년 미국 연방 대법원

입력
2016.01.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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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월 22일

대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낙태 찬반 논쟁은 이어져왔다. 자료사진
대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낙태 찬반 논쟁은 이어져왔다. 자료사진

1973년 1월 22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낙태를 합법화했다.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 판결이었다. 그 판례에 따라 주 별로 낙태를 불법화한 법률들은 “적법절차 없이 개인의 생명과 자유, 또는 재산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수정헌법 14조 위반이 됐고, 여성은 임신 후 6개월까지 임신중절수술을 선택할 권리를 얻게 됐다.

1969년 6월 21세의 노마 매코비(Norma L. McCorvey)는 셋째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다. 16세에 결혼해 첫째를 낳았지만 남편의 폭력으로 금세 이혼했고, 어찌어찌 하다 둘째를 또 임신해 입양을 보낸 터였다. 그 무렵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게 된다. 69년 당시 그는 아버지 집에 얹혀 살며 식당일 같은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던 중이었고 아이를 양육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그가 살던 텍사스 주 형법은 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닌 한 낙태를 금했다. 그는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강간 임신으로 꾸며 낙태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불법 낙태시술소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급기야 변호사에게 찾아가 사정을 알렸고, 낙태 합법화 운동가이기도 했던 두 여성 변호사(린다 커피, 사라 웨딩턴)의 소송이 시작됐다. 피고는 댈러스카운티 지방검사 헨리 웨이드(Henry Wade)였고, 원고는 익명(Jane Doeㆍ모씨)으로 소송이 진행됐다.

종교와 의학 윤리 등 낙태를 둘러싼 찬반의 격론이 이어진 끝에 대법원은 7대2로 매코비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매코비의 낙태선택권은 수정헌법 14조 1항의 자유권의 일종인 ‘프라이버시’로, 결혼 임신 출산 피임 등과 함께 동등하게 보장돼야 할 권리라고 밝혔다. 법원은 “인간의 생명이 어느 순간부터 시작되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철학 신학 의학 등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정립된 이론은 없다”고 전제한 뒤 임신 후 첫 3개월은 임부의 독자적인 선택을 따르고 다음 3개월은 임부의 건강에 대한 의사들의 판단을 반영해서 낙태선택권을 부여하되, 6개월 이후로는 태아가 생존능력을 가지므로 낙태를 금지했다.

낙태를 둘러싼 찬반 대립은 판례와 별개로 치열하게 이어져왔다. 훗날 자서전 등을 통해 69년 소송의 원고가 자신임을 밝힌 매코비는 두 야심 많은 여성 변호사의 꾐에 넘어간 결과였다며 소 제기 자체를 후회했고, 열렬한 낙태 반대운동가로 활동했다.

한국의 형법 제27조는 낙태를 1년 이하 징역과 200만원 이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모자보건법 제14조는 다만 우생학적ㆍ유전적ㆍ전염성 질환, 강간(준강간)과 근친간에 의한 임신 등에 한해 중절수술을 허용한다. 한국 정부는 필요에 따라 저 법령을 덮어두기도 하고 펼치기도 했다. 산아제한정책 기에는 사실상 사문화된 법령이었고, 2010년 저출산대책이 필요해지자 불법 낙태시술 단속을 강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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