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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분투기] ‘전업맘’이라는 이름의 무게

입력
2016.01.21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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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월 된 아들은 또래보다 말이 빠른 편이다. 말문이 트이기 전부터 “응응?”거리며 손가락 하나로 엄마를 조종하더니 어느샌가 단어의 첫 글자를 내뱉었다. 이제는 아침이면 “엄마, 빨리 일어나”하며 졸려 비비적거리는 나를 잡아 끈다. 얼마 전에는 난데없이 손을 번쩍 들고 ‘응답하라 1988’의 유행어 “아이고, 김 사장!”을 따라 해 한참을 웃었다. 온종일 아이와 함께하며 인간의 언어습득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일은 꽤 흥미롭다.

아이의 말이 빠르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재미있다. 근처 공원이나 도서관에 가면 또래 엄마들은 꼭 아이의 개월 수를 묻는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아이보다 어린데 말이 빠르다며 신기해한다. 몇 번 그러고 나니 괜스레 멋쩍어져 누가 물으면 부러 개월 수를 더해 말하곤 했다. 그런데 얼마 전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은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 아이의 말이 화제에 올랐다. 워킹맘인 친구는 아이의 말이 느려 고민 중인 모양이었는데 내 얘기를 듣고 단번에 이렇게 말했다. “역시 엄마가 키우니까 다르구나.” 별 뜻 없이 한 친구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전업맘을 대하는 사회의 입장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에서다.

사회적으로 나는 ‘전업맘’이다. 하지만 나의 ‘전업’이 ‘엄마’라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만일 가정이 직장이고 내가 고용된 엄마라면 해고를 면치 못했으리라. 우선 아이와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하루 종일 신나는 일을 갈구하는 아이의 눈빛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애써 머리를 굴려 잠시 놀아주면 이번에는 체력이 문제다. 슬그머니 리모컨을 찾아 구원투수 타요와 폴리를 부른다. 요리도 서툴러 엄마표 영양간식은커녕 삼시세끼 같은 반찬으로 하루를 넘기기 일쑤다. 그래도 사랑은 듬뿍 주지 않느냐고 물으면 고개가 숙여진다. 욱하기를 잘해 세 살 아이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고 아이가 울다 드러누우면 나 역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우는 아이를 하염없이 바라볼 때도 많다.

이렇게 뒤죽박죽인 하루를 임기응변으로 보내는데 주위에서는 전업맘이면 아이에게 집중할 수 있으니 아이가 잘 자라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한 기대는 부담일뿐더러 때로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든다. 일과 경제력을 포기하고 육아를 택한 만큼 보란 듯이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고군분투하는 워킹맘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대부분의 기대는 반대의 경우 화살로 돌아온다. 아이가 넘어져 다쳤을 때였다. 근처에 사는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대뜸 “집에서 애 하나 보면서 뭐하느냐”고 나를 나무랐다. 맞는 말이었지만 서러워 눈물이 났다.

지금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들은 대부분 베이비붐 세대 밑에서 자란 에코세대다. 에코세대의 여자들은 전 세대에 비해 많이 배웠고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의식이 몸에 배어있다. 그녀들이 출산 후 이런저런 이유로 일을 접고 집에서 아이만 키우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몸과 마음이 고된 일이다. 하지만 사회의 눈은 다르다. 사회에서는 마치 모든 엄마들이 예전부터 일과 육아를 병행해왔던 것처럼, 일을 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큰 혜택을 받은 듯이 바라본다. 그래서 전업맘들은 당연히 아이를 잘 키우리라 기대하고 엄마가 아이를 맡기고 개인생활을 하면 비난이 쏟아진다. 또 아이가 문제 행동을 보이면 전적으로 엄마책임인데 그 화살은 워킹맘에 비해 날카롭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많은 전업맘들은 상처를 받는다.

작년 한 해 동안 전업맘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육아에 지쳐 잠시 아이를 안고 간 카페에서조차 눈치가 보였으니 말이다. 올해는 어떨까. 7월부터 전업맘의 어린이집 이용 시간을 제한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순탄치 않아 보인다. 30대 기혼 여성 열 명 중 네 명이 ‘경단녀’라는데 그녀들의 또 다른 이름은 전업맘일터다. 절반에 가까운 그녀들을 위한 배려도 필요하다.

이정미 전업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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