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거의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여야는 오전8시 또는 9시에 각기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그날의 말 잔치를 시작한다. 당연히 각종 교착된 현안의 책임이 상대 당에 있다는 말들이 줄을 잇는다. 그런 말 가운데 요즘 단골메뉴는 단연 경제활성화 법안이다. 여야 모두 여론의 관심이 높은 법안이 처리되지 못한 이유를 상대에게 떠넘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20일에도 비슷한 양상이 반복됐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노동개혁 5개 법안 처리 등의 필요성을 한참 언급한 뒤 이례적인 ‘사과’를 했다. ‘국회기능을 마비시키는 희대의 망국법인 국회선진화법을 (과거) 새누리 주도로 잘못 통과시킨 것에 다시 한번 사과한다’는 얘기였다. 물론 이 말은 국회선진화법이 경제활성화 법안을 다수당 의지대로 가결시키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고 있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비슷한 시각,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대표는 “정부가 나쁜 일자리 양산하는 노동악법을 밀어붙인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단체가 주도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해 국정조정 역할을 망각하고 있다”고 예의 비난을 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경제활성화 촉구서명 운동은 이처럼 교착된 정치권 상황의 연장선에 있다. 서비스산업발전법(서비스법)과 기업활력제고특별법(원샷법), 노동개혁 5개법 등 경제 관련 법안은 작년 연말부터 협상이 진행됐다. 하지만 입장 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면서 여야는 기존 입장만 재확인해 왔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국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까지 더해지면서 협상은 더 꼬여 버렸다.
야권 일부, “서비스법, 원샷법 협상에 적극 나서자”며 입장 선회 필요성 시사
이런 교착상태에 이날은 기류 변화가 감지됐다. 야권 내부에서 법안 처리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전병헌 더민주 최고위원은 이날 “서비스법과 원샷법에 대해서도 조속히 타결할 필요가 있다”며 “사실상 합의를 이룬 이들 2개 법안에 대해 여야가 적극 나서 마무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 인수합병의 규제를 완화하는 원샷법과 관련, “(재벌에 대해) 국민 신뢰를 잃을 수 있는 과잉대응은 야당으로서 자제돼야 한다”고도 했다. 앞서 국민의당도 이들 2개 법안에 대해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더민주가 적극 처리로 입장을 바꿀 지 주목되는 부분은 또 있다. 앞서 이목희 더민주 정책위의장은 원샷법의 경우 재벌 오너의 편법 상속과 경제력 집중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된다면 타협하겠다고 밝혔다. 서비스법의 경우도 보건의료 부문의 영리화ㆍ민영화를 막을 ‘장치’가 있으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모두 당초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선 내용으로 평가된다.
‘묶어 처리 식’ㆍ‘던지고 보자 식’ 제안에 협상은 제자리 걸음
기류가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야 간 협상을 낙관적으로 보는 전망이 아직은 많지 않다. 무엇보다 그 동안의 경험칙 때문이다. 여야는 경제 관련 쟁점 법안들에 대한 협상마다 번번이 나타난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해왔다. 당장 18, 19일 이틀만 해도 여야는 기획재정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위원회의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어 각각 서비스법과 원샷법을 다루려 했다. 여야의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원내수석부대표의 ‘3+3 회동’도 예정돼 타협안이 나올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그러나 새누리가 단독으로 운영위원회를 소집해 국회선진화법 개정안을 고의 부결시키고, 더민주가 이에 반발하며 모든 국회 일정을 보이콧하면서 법안심사 소위는 열리지 못했다.
협상 장이 아닌 장외에서 해법을 주고 받는 ‘던지고 보자 식 제안’이 반복되는 것도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노동 관련 5법의 경우 정부, 여당이 최근까지 “무조건 한데 묶어 처리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야당은 파견법, 기간제법은 비정규직을 무한정 늘릴 수 있어 ‘패키지 처리’는 안 된다고 버텼다. 그러다 문재인 대표가 지난해 12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기간제법, 파견법을 뺀 나머지 3개 법안이라도 먼저 처리하자”고 제안하자 이번에는 새누리가 “패키지 처리가 아니면 안 된다”며 일축했다. 그리고 해가 바뀐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기자 회견에서 “기간제법은 미루고 나머지 4개 법안은 최대한 빨리 처리해 달라”고 역제안을 하자 다시 야당이 “파견법 만으로도 최악의 법”이라며 수용을 거부했다. 이런 주고받기 식 제안을 짚어 보면 여야 어느 한쪽을 비난하기 어려운 흐름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협상 장 안에서 긴밀히 제안해야 할 내용을 공개된 장소에서 ‘내가 이 만큼 양보했으니 받아라’는 식으로 던지다 보니 상대방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협상의 기술 문제를 지적했다. 우리 정치가 남 탓을 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을 이끌어내는 타협에는 서툴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 관련 쟁점 법안이 아직 처리되지 않은 데는 지난해 11월 여야가 새해 예산안과 연계 처리하는 ‘패키지 협상’을 한 것이 중요한 이유다. 당시 여야 협상에 관여한 인사는 “워낙 많은 것을 다루다 보니 개별 법안에 집중하지 못했다”며 “협상이 길어지면서 급한 불부터 끄자는 분위기에서 경제 관련 법안이 뒤로 밀렸다”고 전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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