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끌림 때문이었나. 태백산을 오른 건 조금 즉흥적이었다. 가슴이 답답해 불쑥 떠난 여행길. 눈보라 휘몰아치는 백색의 공간에서 가슴 속 천불을 삭이고 싶어 나선 길이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강원 태백이다. 하지만 두문동재를 넘어선 순간 기대가 무너져 내렸다. 눈 내린 자국을 찾기 힘들었고 잿빛 풍경이 을씨년스러웠다. 태백의 골골을 뒤졌지만 순백의 풍경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날 태백의 지인들과 어울린 저녁 자리에서도 주제는 눈이었다. 내주가 눈축제인데 지독한 눈 가뭄 때문에 고민이 크다고 했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며 소주잔을 부딪치는데 창문 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인들의 표정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태백에 눈이 내리면 아름다운 동화 속 세상이 된다며 내일은 분명 태백이 달라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근사한 설경 이곳 저곳을 들먹이던 그들은 내게 새벽에 일어나 태백산을 오르라 권했다. 뭐니뭐니해도 태백의 설경 중 압권은 태백산이라며 등을 떠밀었다.
다음날 새벽 4시 조금 넘어 시내의 여관을 나섰다. 밤새 내린 눈으로 길이 미끄러워 예정보다 늦게 유일사 매표소에 도착했다. 아이젠을 차고 장비를 챙겨 들고는 서둘러 산행을 시작했다.
신새벽의 바람은 찼다. 하늘의 구름 사이로 별들이 총총했다. 정상에서 일출을 맞으려는 산행객은 이미 떠난 지 오래. 하얀 눈길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카펫이었다. 입구의 가로등이 멀어졌고 랜턴도 없었지만 길을 놓치지 않았다. 바닥에 깔린 흰 눈이 별밤의 부스러기 빛들을 모아 앞선 이들의 발자국을 비춰줬다.
등산로 초입의 한 당집을 지날 때다. 이른 시간임에도 마당의 돌탑 앞에서 무녀가 부채와 방울 등 무구를 흔들며 제를 올린다. 산신께 드리는 아침인사인가 보다. 컴컴한 산길이 더 으스스해졌다. 마음을 다독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답답하고 간절해 걷는 걸음이다. 이 정도 불안감이야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 유일사 쉼터를 지나며 경사가 조금씩 급해졌고 숨이 가빠졌다.
사위는 밝아왔고 하늘의 별들도 사라졌다. 산길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기 시작하자 길 옆의 나무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태백산의 주목들이다. 산행길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주목들은 그 모양이 제각각이다. 천제단을 지키는 호위병마냥 우뚝 버티고 서서 동태를 감시하는 듯하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나무다. 그 오랜 시간 갖은 풍상을 다 겪고 여러 흥망을 지켜본 나무들이다. 물기가 거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자라 속살이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물기가 적다 보니 죽어서도 좀체 썩지 않는 것이란다. 그 단단함으로 죽어 속이 텅 비었음에도 백두대간을 넘어 부는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것이다.
주목의 단단한 몸체가 설화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죽은 나무가 피워낸 세상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태백산을 더 영험하게 하는 건 이 주목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망경사갈림길을 지날 때 태백산의 일출을 맞았다. 역시나 장엄했다. 구름을 바다 삼아 빨간 햇덩이가 솟구쳤고, 순백의 설산이 붉게 물들었다. 간절함의 하나가 이뤄진 듯 황홀했고 가슴이 후끈 달아오른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주목 군락이다. 순백의 갑옷으로 무장한 주목들의 대열은 태백의 설경을 동화 속 세상인 아닌 신화의 공간으로 만든다. 그렇게 황홀경에 취한 채 태백산 제일 높은 장군봉에 이르렀고 날 선 돌틈에 하얀 눈꽃을 달고 있는 장군단을 마주했다.
여기서 천제단까지는 풍경의 프레임이 증폭된다. 일망무제. 주변의 모든 산자락이 발 아래다. 백두대간 낙동정맥이 함께 어우러지며 셀 수 없는 산봉우리들이 바다를 이룬다.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산자락들을 흰 구름과 안개가 빠른 속도로 타고 넘는다. 그렇게 순백의 하늘길을 걸어 태백산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공간인 천제단에 이르렀다.
천제단에서 하늘에 제를 올릴 때면 구배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간절한 염원을 지니고 태백산에 오르는 이들 또한 이곳에서 아홉 번 절을 올린단다. 그 만큼 더 많은 걸 기원할 수 있고, 그 만큼 더 간절함을 반복해 기원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세상의 간절함이 집약돼있는 듯한 천제단을 쉬 떠날 수 없었다. 산행객들이 다 내려간 뒤 홀로 남았다. 그제서야 수풀에 숨어있던 까마귀들이 날아 올라 천제단 위를 휘젓는다. 고요를 찾은 태백의 정상. 골에서 피어 오른 안개가 훨훨 춤을 추다 햇빛에 부서진다. 눈 앞에 펼쳐지는 마법 같은 세상에 눈이 부셨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러 오른 길. 산정에 펼쳐진 순백의 조화에 차고 넘치는 위안을 받은 듯하다.
몸이 더 차가워지기 전 다시 산을 내려온다. 맘에 여유가 생겨서인지 주변의 사소한 풍경 하나하나에 시선이 꽂힌다. 주목의 두터운 잎이 피운 설화도 아름답지만 사스레나무의 가는 가지에 붙은 눈꽃 또한 고혹적이었다.
유일사 쉼터에 들러 따끈한 어묵 국물로 속을 데웠다. 쉼터의 아주머니가 카메라를 보고선 태백산의 황홀한 풍경을 짐작하셨는지 “하늘이 도우셨나 보다”며 미소를 짓는다. 하산길 발걸음이 더욱 경쾌해졌다.
태백=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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