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예전엔 타고난 사람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지금은 누구나 도전하는 세상이 되었다. 노래를 감상하던 관객은 무대 위의 가수를 꿈꾸고, 읽기만 하던 독자는 작가의 세계를 넘본다. ‘아무나 하나?’에서 ‘누구나 한다!’의 시대로 변했다. 인터넷이 가져온 큰 변화 중 하나가 바로 누구나 쉽게 글쓰기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종이와 필기구가 있어야 하는 일이 클릭 한번으로 가능해졌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열어 문자나 이메일을 보내고 인터넷이 만든 사회적 관계망에 참여한다. 한편으로는 소통이 원활한 세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과 글이 범람하는 세상이다.
나는 국내에 블로그가 퍼져갈 무렵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읽기만 했지 쓰지는 않았다. 블로그를 시작하며 새롭고 신기한 문화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댓글이었다. 내가 글을 하나 올리면 거기에 사람들이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댓글 쓰는 사람들의 아이디를 클릭해 들어가면 그들 역시 자신만의 글을 쓰고 있었다. 나도 가끔 거기에 댓글을 달았다. 드물게 쓰는 댓글이지만 과한 정성을 들여서인지 이웃들은 ‘글보다 진한 댓글 금지’라며 놀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블로거들이 글과 댓글의 균형을 가졌던 것 같다.
요즘은 그 균형이 무너져가는 것 같아 아쉽다. 사람들은 이제 공을 들여 써야 하는 글 보다는 말 한마디 하듯 쉽게 쓸 수 있는 댓글을 많이 쓴다. 뉴스를 보고 댓글을 달고, 그 댓글에 또 댓글을 단다. 글의 뜻을 더욱 살리는 댓글이 있는가 하면 그저 화풀이나 넋두리 용 댓글도 많다. 글과 상관없이 인기 댓글로 등극하는 쾌감을 갖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인 댓글만 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댓글에 다투자고 덤비는 댓글이 꼬리를 물기도 한다.
댓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것은 일단 좋은 일이다. 그만큼 어떤 일에 대한 자기 생각이 강하고 주장할 내용이 있다는 증거다. 좋은 글에다가 댓글로 사회적 의미를 크게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댓글을 달면서 이런 점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댓글을 달면 남의 글이 되고 글을 쓰면 내 글이 된다는 사실을. 내가 쓴 글이 많아지면 내 자산이 된다. 그게 쌓이면 우리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튼튼하고 생명력 있는 자아를 갖는다는 건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과제다. 생각을 잘 경작한 글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면 영혼의 부자다. 그런 부자가 많은 세상은 방향 없이 날뛰는 물질세계에 고삐를 채울 수 있다.
가까운 블로그 이웃들을 수년간 지켜보니 꾸준히 글을 써온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잘 개척해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라고 세상에 대한 불만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단지 그것을 자신만의 글 속에 집어넣고는 생각의 온도를 높여 녹여버리고 순도 높은 쇳물을 다시 쏟아냈을 뿐이다. 자기 속에 용광로를 가진 사람들, 그들은 밀림을 헤쳐 나갈 검을 만들기도 했고 약자를 위한 방패를 만들기도 했다. 실뿌리 같은 댓글로 다른 사람의 글에 영양분을 공급해주기도 했다. 탁한 물이 싫다고 퍼내버리기만 하면 땅은 마른다. 비옥한 땅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맑은 물이 흘러 들어 탁한 물을 껴안고 흐르게 하는 것이다.
응원이나 비판을 위한 댓글도 의미 있는 글쓰기다. 하지만 한 줄의 글이라도 댓글이라는 화분에 심는 대신 글이라는 대지에 심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땅의 주인이 된다. 그 땅은 아무리 소유해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 없고 탐욕의 노예로 희생양이 될 일도 없다. 잘만 활용한다면 블로그는 자신의 정신을 심고 가꾸기 좋은 땅이다. 지나치게 소통이 원활한 형태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보다는 블로그같은 독립적인 공간이 좋다. 거기에 글을 쓰자. 강물 같은 글과 시냇물 같은 댓글이 흐른다면 개인의 영혼도 세상도 목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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