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여행자를 위해서라도 참을 수 없지"
2달러 때문에 경찰 부른 사연
때론 쉽게 끝날 일이 커져 버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저 “미안해요.” 한 마디만을 원했을 뿐이었는데... 그 말을 못 들어 경찰을 불렀다. 과테말라 안티과에서다.

사실 속는 것을 아리땁게 포장할 언어가 세상에 있을 리 없다. 나 대학 나왔어, 배울 만큼 배웠어(대략 정상), 부모님이 금쪽같이 키운 자식이라고(점점), 나 너보단 몇 배는 잘난 사람이야(치졸해지기 시작). 그런 내가 타지에서 속아? 무릎을 꿇자. 우린 속는다. 여행 중엔 알든 모르든 크든 작든 당한다. 중남미 여행이 길어질수록 사기 대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사기 당하는 시리즈를 찍었다. '더 크고, 더 세게' 트랜스포머의 귀환이다. 정형이 없다. 아는 사기를 넘기면 모르는 사기가 왔다. 여행의 시작이자 불운의 형제인 사기. 고로 애초에 여행에서 사기를 조심하란 조언은 그다지 쓸모 없다. 그런데 '사기 그 후'는 확실하게 처리해야 했다.

과테말라 안티과 시장에서였다. 안티과는 스페인 식민과 18세기 지진의 상처가 곳곳에 아리도록 널려있는 역사 도시다. 다음엔 뭘 할까? 어디로 갈까? 어릴 적 선물 박스를 막 열어볼 때의 상기된 표정이 함께한다. 불가사의한 건 여행자의 향수병을 임시 치료할, 고향 같은 품도 갖고 있다는 점. 마음이 편해지고 동시에 자유로워진다. 그래서 호스텔에선 눈곱 낀 상태로 이런 아침 인사를 주고 받는다. "너 분명히 오늘 떠난다고 하지 않았나?(=안 떠날 줄 알았어)" 장기 투숙자의 묘한 공감이었다.



그저께 떠나기로 한 계획을 바꿔 점심을 위해 시영 시장(메르카도 무니시팔, Mercado Municipal)을 다시 찾았다. 한 발을 들이자 인디오 행상들과 어깨를 부딪쳤다. 전혀 다른 시공간이다. 복잡하고 시끄럽고 동시에 정겨운 우주. 옷가지와 기념품, 식료품, 그리고 웃는 인디오 상인들이 이곳의 빈틈없는 병풍이자 카펫이다. 발길을 멈춘 곳은 한 인디오 아낙네의 가게 앞, 노상 뷔페라 생각하면 된다. 원하는 양과 가짓수만 제시하면 미안할 정도로 낮은 가격으로 한 접시를 내어 받는다. 당과 지방이 부족한 듯해 탕탕에게 2차 가자고 했다. 주문한 메뉴는 딱 3가지. "파파스 프리따스(감자튀김), 세르베사(맥주), 리꾸아도스(열대 과일과 우유를 섞은 셰이크), 포 빠보르(please, 부탁해)."

메뉴판도 안 보고, 가격도 몰랐다. 하지만 우린 과테말라 체류 20일 경력자. 시장인 데다가 감자튀김이 인정머리 없이 적은 양이라 가격도 쌀 거라 안심했다. 식사를 마친 후 총 금액을 물었다. 뭐라고? 이곳은 5성급 호텔 식당이었구먼! 금이 간 식당 벽이며, 금세 부서질 듯한 나무판자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말이다. 55Q(1Q=0.13달러)라고 했다. 메뉴 하나씩 가격을 캐물었다.
“감자튀김은 20Q이고 맥주는 30Q, 그리고 어... 셰이크는..."
다시 물었다.
"감자튀김은 25Q, 셰이크는 20Q, 맥주는 25Q... ??"

세계 공통 언어인 숫자를 파괴하는 당신이시여. 주인은 총 금액에 맞지 않는 황당한 숫자를 목청껏 하늘에 쏘아붙였다. 영수증을 달라고 했다. 없단다. 아니 안 된단다. 급기야 파리만 날리는 식당 안에서 우리의 시선을 피해 부산스러운 척했다. 괘씸했다. 싸움을 제대로 하려면 적군의 수를 파악하는 게 중요한 법, 우리의 적은 아이라이너로 눈에 힘을 준 기센 여주인 셋이었다.
영수증 간청에도 응답하지 않은 여주인을 등지고 나오며 우릴 '호갱님'으로 치부한 그들을 엄단할 결심을 했다. 관광 경찰을 찾았다. 과테말라는 범죄가 많은 나라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지라 일부 도시엔 관광 경찰이 있다. 론리 플래닛에 나온 경찰서 위치엔 키 높은 벽이 세워져 있었다. 동네를 쳇바퀴 돌듯 돌았다. 분노 지수는 점점 높아져갔다. 날씨는 기똥차게 좋아 금쪽 같은 시간을 앗아간 죄질까지 더해졌다.

드디어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경찰서에 당도했다. 침 튀기 경주대회에 나선 것처럼 탕탕과 난 열변을 토했다. '알잖아. 이런 가격이 시장에서 불가능한 거.' 그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일을 더 크게 벌일 발언을 했다.
"그 사람들 처벌하려면, 리포트를 써야 해. 일단 다른 경찰이 영업 실태를 조사하고, 리포트를 올려서 승인을 받아야 처벌이 이뤄져. 여기 작성해."
"아니(손사래를 쳤다) 그게 아니라 우린 그냥 그들에게 '경고'를 하고 싶어."

리포트를 뒤로 한 채 두 명의 경찰을 앞세웠다. 든든해야 하는데 되레 불안했다. 동네의 건장한 청년을 매수하는 게 옳지 않을까? 경찰은 경찰인데, 엄마 젖을 더 먹어야 할 듯 핏기 없는 얼굴과 비리비리한 몸의 소유자들이었다. 어쨌든 피해자인 우린 그들을 따라 나섰다.
식당 안. 역시나 두 경찰을 보자마자 아이라이너 마마들은 우리를 비난하는 속사포 랩을 쏘아댔다. 경찰은 그 아우라에 뒷걸음질까지 쳤다(난 분명히 보았다). 시장의 이목이 쏠렸다. 꾸벅꾸벅 졸던 개까지 일어나 기웃거렸다. 경찰의 주의대로 우린 그들 뒤에 말없이 서 있었다. 휴~ 우리가 원한 건 그저 "미안하다."란 말뿐이었는데.


여행하면서 사기를 당하면 늘 후폭풍이 문제였다. 자신을 잔뜩 질책한 후(난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그 나라를 통째로 저주했다(이런 망할 나라 같으니!). 급기야 사람을 믿지 않았다(너도 나 속이려는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저 속는 거로 그치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여행자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 아이라이너 마마 때문에 시장을, 안티과를, 더군다나 과테말라를 마음속에서 잃고 싶지 않았다. 다른 여행자에게도 서슴없이 추천하고 싶었다.
우리가 '호갱'으로 그친다면, 그들은 다음 여행자도 '호갱'으로 상대할 것이다. 시장에 그런 행위가 가득해지면, 미래의 여행자들은 점점 발길을 끊게 된다. 현재 우리가 기쁘게 여행하는 그 길엔 분명 바름을 실천하는 선한 여행자가 있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엔 미래의 여행자가 함께할 것이다. 우린 결코 심심하고 돈이 많아서 길을 나선 것이 아니다.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사명감 아래 우린 행동했다. 아이라이너 마마들은 다른 여행자에게 사기를 쳤을까? 정직의 유통기한이 얼마나 길었을진 몰라도 당분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그리해야 한다.
여행의 선물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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