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오던 밤, 인적 없는 골목 한편에 누가 서 있었다.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람의 얼굴. 벌거벗고 있었다. 피부색은 완전 검정. 마네킹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냐면 그게 아니다. 흰 눈발 속에 꼼짝 않고 서 있는 검은 형체가 사람보다 더 섬뜩했다. 검은 피부와 대비된 희고 큰 눈빛이 슬프고도 무서웠다. 어느 망한 옷가게에서 내다버린 것일까. 자본에 의해 가공된 미의 기준치를 정도 이상 과장하여 길게 뻗은 9등신 몸매가 잎을 다 떨군 겨울나무 같았다.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려 수시로 화려한 옷을 갈아입고 서 있다 용도 폐기된 귀신의 형상. 한때 주목 받던 영예가 그 자체로 저주가 되어 무참하게 버려진 여인의 냉혹한 복수극 같은 것도 떠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자못 안쓰러워졌다. 잠깐 그 앞에 서서 집에 데리고 갈까, 고민했다. 거실에 세워두고는 심심할 때 말도 걸어주고 옷도 갈아입혀 주면서 밥도 같이 먹는, 뭐 그런 만화 같은 상상도 했다. 그 말 못하는 플라스틱 인형이 진짜 사람처럼 보였던 거다. 헛것과 실재의 경계에서 사람의 손때를 타다 진짜 사람이 돼버린 무기물의 환생. 그 처연한 모습이 끝없이 가공·재생되다가 결국 쓰레기로 폐기처분되는 욕망의 굴레를 형상화하는 듯 보였다. 내리는 눈을 손에 받아보았다. 진짜 구름의 결정이 아니라 누군가 뿌려대는 솜털 자락이 아닌가 의심스러워진 탓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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