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팥죽 먹으러 찾은 이웃집
고된 들일 겁난다는 뜻밖의 말씀
‘초짜만의 고민 아니구나’ 위안 받아
농사란 무엇인가 새삼스레 고민
“빚이다” “기다림이다”
“땅 있으니 살려고 하는 일이다”
귀농 친구, 동네 어른 붙잡고 술상토론
팍팍해도 자유만은 좋다더라
흐릿하던 노고단 능선이 금새 실루엣마저 잃었다. 차 안의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었다. 열흘 전만 해도 다섯 시 반이면 캄캄했는데 그새 달라졌다. 전북 장수로 귀농한 형님이 집들이를 한다고 해서 소주 한 박스 싣고 달리는 길이었다. 해가 길어졌다고 생각하니 옆자리 술병들이 부딪히는 소리만큼 가슴이 뛴다. 설렘이냐고? 천만에.
“죽 한 그릇 잡수러 와.” 그날도 오봉댁 어머니의 전화가 아니었으면 동짓날인 줄도 모르고 지날 뻔 했다. 팥죽 한 대접을 기점으로 해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동치미를 더 주마” 하시던 어머니가 “봄이 오는 게 두려와” 하셨다. 뜻밖의 말씀인데 내 마음이 놓였다. 나도 두려웠던 거다. 초짜 티 내기 싫어 말은 안 했지만 농사 도사께서 일이 두렵다고 하니 안심하고 겁내도 될 일이 된 거다. 나도 농사 5년 만에 “봄이 두렵다”고 했더니 농사꾼 다 됐다고 하셨다. 칭찬에 으쓱했지만 이제 내내 그럴 것이라는 말씀이니 다시 겁이 났다. 그래서 가슴이 방망이질이다.
새로 지은 형님 집에 들어섰다. 풀 냄새 아직 가시지 않은 벽지가 환하고, 바닥은 국민학교 때, 죽어라 왁스칠 했던 복도처럼 반짝거렸다. “아이고 형님 성공하셨네.” 같이 간 순천 형님이 구석에 솟은 벽난로를 보며 부러워했다. 귀농학교 동기들이고 비슷한 시기에 내려와서 마치 형제 같은 분들이다. “성공은 무슨. 빚이 반이다.” 집들이 때면 으레 오가는 대화였다. “농사지어서 어떻게 갚을라고 빚을 져요 그래.” 그 소리도 많이 들었나 보다. “시끄러우니까 술이나 쳐 드셔.”
차려진 술상 아래로 소주병이 줄을 서고 사람들 자세도 옆으로 길어졌다. 취기가 가득해지니 우스개 소리도 끝나고 진지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집 짓고 나니 이게 잘한 건가 싶어.” 장수 형님 말씀을 순천 형님이 이었다. “그러게요. 자리 잡은 데가 뼈 묻을 곳이 맞나 싶은 생각도 들구요.” 큰형님이 물었다. “니들은 농사가 뭐라고 생각하냐?” 순천 형님이 입시 면접처럼 답했다. “기다림이죠.” 형님은 몸을 일으켰다. “씨 뿌려 놓고 하늘과 땅의 기운을 믿고 기다리는 거. 순리를 알아가는 게 농사 아닌가요.” 장수 형님이 웃었다. “야, 누가 보면 농사 한 30년 진 사람인 줄 알겠다. 어디 강연하냐?” “그게 아니구요. 농사라는 게 빨리 얻으려고 해도...” 그 좋은 말씀을 마저 듣지 못하고 정신줄을 놓았다.
아침 눈 발에 고립될까 두려워 해장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전 쌀이랑 콩이랑 이것저것 판다고 올렸고 주문이 꽤 들어와 있었다. 대부분 지인들이고 간혹 전해 듣고 주문하는 분들도 있다. 진심으로 모두가 고맙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고마운 분들은 주문량이 많은 고객이 아니라 입금 빨리 하는 사람이다. 성격이 별로 안 좋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제때 째깍째깍 입금 하는 걸 보면 그렇게 착해 보일 수가 없다. “돈 보내면 쌀 보내주지” 할 수도 없고 독촉 전화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지켜보다 보니 그렇다. 친한 친구도 한 달 넘어서야 “미안, 깜빡 했네” 메시지 보내면서 입금하면 용서하는데도 그만큼 걸린다. 내가 그런 놈이었다.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쌀이 문제였다. 우리 먹을 쌀이 모자라겠다 싶었다. 아내가 보더니 “우리는 또 사먹어야 되는 거야?” 묻는다. 작년에도 보내기로 한 쌀이 모자라 이장님 댁에서 얻어먹었는데 올해도 그래야 하냐는 것이다. “그럼 어떡해. 이미 ‘고맙습니다’하고 문자 다 날렸는데...” 이제 와서 ‘우리도 굶을 판이니 쌀 못 보내요’하고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야무지지 못한 일 처리에 화도 났지만 미안했다. 쌀농사 지으면서 2년째 쌀 사다 먹어야 하는 꼴이 한심했다.
점심때가 살짝 지나 마을회관으로 갔다. 청국장을 띄워야 하는데 무림의 비법을 갖고 계신 분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수들 천지다. 다들 반가워하신다. “아이고 원샌 오셨네. 드루와 여기 적(전) 좀 잡솨.” 큰 쟁반에 소주 몇 병과 배추전이 쌓여 있고 그 옆에 대여섯 분이 초록색 담요를 중심으로 모여 계셨다. 전형적인 겨울 마을회관의 분위기다. 최근 회관에는 고스톱이 물러가고 ‘나이롱뽕’ 바람이 불어 어르신들은 숫자 공부에 열중하셨다. 언뜻 보면 지폐만 있어 판이 커 보이지만 1천원씩 내서 판돈을 만들고 이긴 사람이 한 장씩 빼 가는 식이다. “일루와. 소주 한 잔 하셔.” 회관 앞집 아버님이 플라스틱 컵에 소주 따르시는데 겨우 병을 뺏어 다시 따라드렸다. “운전해야 해서요.”
어깨 너머로 구경하다가 담배 피우러 나가시는 분 대타로 들어가 다행히 2천원 따 드리고 다시 빠졌다. 어머니들이 누워 계신 ‘여자방’으로 들어가 옆에 엎드렸다. “적 잡솨.” 또 쟁반을 들이미시는 걸 “마루에서 많이 먹었어요”하며 다시 가운데로 밀었다. 용건을 시작했다. “엄니, 청국장에 소금을 얼마나 넣어야 해요?” 물었더니 “짭쪼롬허고 맛나게 넣어야지요” 하셨다. 멀끄러미 바라보다 생각하니 우문현답이다. 아니면 어떻게 답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오히려 질문은 내게로 몰렸다. “원샌이 청국장도 띄울라고요?” “원샌은 그런 게 재밌다요?” “원샌은 그런 거 팔면 얼매나 받아요?” “원샌꺼는 비싸게 받아야 헐틴디 워쩌케 판다요?” 대통령 기자회견도 이렇게 활발했으면 좋으련만.
이미 청국장 비법은 물건너갔고 장수 형님 댁에서 나왔던 얘기가 생각나 여쭤 봤다. “엄니는 도대체 농사가 뭐냐 하고 누가 물으면 뭐라고 하실래요?” 그곳 최 연장자인 간전댁할머니를 쳐다봤다. “난 몰러요. 땅 있응 게 지은 거고 먹고살 거 없응 게 한 거지.” 오봉댁어머니도 한 말씀 하셨다. “농사라는 게 넘들 따라 장에 가듯 했어요. 뭐 계산 하믄서 헌당가요. 아무 생각 없이 칼 물고 뜀뛰며 살았어요 우린.” 봇물 터진 말씀들에 힘든 세월이 녹아 있었다.
“맨날 빚에 쫓겨 사는 거예요.” 마을에서 농사도 제일 크게 짓고 대형 농기계도 다 갖춘 집의 형수님이 말했다. 의외였다. 규모만큼 수입도 되고 기계 일을 해 주니 현금도 많다고 알고 있었다. “상기네도 그렇다요?” 전 이장님도 반문했다. “이번에 바꾼 트랙타가 8천만원 인디 그 돈이 어디 있었대요. 땅 잽혀 빚 얻고 갚다가 또 얻고 그래야죠.” 걸핏하면 고장 나서 한 번 수리하면 200만원이고, 나사 하나 바꾸니 10만원이고, 형수님은 기계를 운영하면서 겪는 고충을 털어놨다. “농사는 부업이예요. 다른 일 안 하믄 살 수 있간대요. 나도 면사무소 일하면서 칡넝쿨 뽑으러 다니고 하니까 살지, 아니믄 못 살아요.” 그 때 벽에 붙어 누워계시던 일천댁이 몸을 일으켰다. “나도 자리만 있으믄 용공근로 하고 잡은디 허리가 아파서 못 혀.” 나만 눈이 커졌지 다른 분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용공근로’는 공공근로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어르신들 말씀은 문맥을 잘 읽어야 한다. ‘꼬꾸리’는 포크레인이고 ‘대람빡’은 담벼락이고 인건비도 ‘인권비’로 하신다.
“농사는 전염병으로 망해요. 넘들이 쓰는 기계 나도 갖고 싶고, 돈은 없응 게 빚 내서 사고 그래요. 원샌도 트럭 사고 나니께 다른 거 사고 싶지요?”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그게... 요즘 건조기가 자꾸 눈에 거슬리긴 해요” “거 봐요. 워쩌케든 사게 된당게요. 그만큼 못 뽑으니까 문제지요.” 이야기는 이리 저리 흘러가다가 옛날 얘기로 흘렀다. “지금은 그래도 하느님이요. 난 모내기 때 별 보면서 모 심었어요.” “난 밤에 나락 가마니 나르고 거름지게 다시 질려고 보니 날이 새드구마.”
내가 질러 놓은 불이 계속 번지는 느낌이었다. 살짝 방향을 바꿨다. “그래도 농사가 좋은 점도 있지 않나요?” 오봉댁어머니가 한 손을 뻗으면서 말씀하셨다. “자유!” 마치 투사의 느낌이었다. “내 맘대로 한 다는 거 있지요. 뭐가 되든 어떻게 되든 내가 알아서 하니께 좋은 거지요.” 그래서 여쭤 봤다. “막내가 시골 내려온다면 엄니가 받아 주실래요?” 대답은 여기저기서 나왔다. “반대여. 결사반대!” 모두가 반대였다. “안돼요. 애 덜 교육 다 시키고 돈 많이 벌어서 편히 살라고 내려오는 거 아니믄 안돼요. 돈을 벌 방도가 없는디?” 다시 여쭤봤다. “저 내려왔을 땐 무슨 생각 드셨어요?” “돈 많이 모아 오는 갑다 했제.” 그 때 동시에 여기저기서 ‘뻐꾹’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에서 정각을 알리는 소리였다. 어르신들이 일제히 일어나셨다. 집에 가서 저녁 드시러 나서시던 아버님이 웃으셨다. “원샌덕에 잘 떠들다 가는구마. 또 오소이.”
나도 나와서 읍내로 갔다. D동생 생일이라 저녁이나 같이 먹기로 했다. 식당에 들어서니 동생은 이미 와 있고 식당 주인인 박사장이 찬을 내오고 있었다. 미역국은 먹었는지, 하루 종일 뭐 했는지 얘기하다 보니 음식은 차려졌는데 술이 없었다. “오늘은 한 잔 안 해? 술 끊었어?” 물으니 동생이 답했다. “형님 저 술 못 묵어요.” “왜? 어디 아파?” 동생은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거이…없어서 못 묵지라.” 지 말에 지가 좋다고 낄낄댄다. 주방에서 소주병을 흔들며 나오던 박사장이 한마디 했다. “형님, 야가 술을 못 묵어요? 개가 똥을 마다하게요.” 또 낄낄댄다.
D동생은 요즘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유류배달 트럭도 마련했고 열풍기가 있는 비닐하우스마다 다니며 영업도 열심히 하고 있다. 자연농법으로 감 농사를 짓겠다고 야심 차게 출발했지만 힘든 것은 둘째 치고 돈을 만들기 어려웠다. 아직 미혼인지라 결혼하려면 안정된 수입이 있어야겠고 해서 주중엔 아르바이트하고 농사는 주말에 지을 계획이라고 했다.
“형님. 직장 다닐 때 만났던 친구가 내려와서 농사짓겠다고 하는데 참 뭐라고 할 말이 없대요.” 나도 특별히 해줄 말이 없었다. 동생은 말을 이어 갔다. “나도 이 꼴로 살아가고 있는디 친구헌테 잘될 거라고 그짓말 할 수도 없고요.” 친구 걱정도 있지만 본인도 걱정이 크다는 말로 들렸다. “농사는 참 좋아요. 나한테는 배움의 장이거든요. 깨닫는 것도 많고 정리도 되고요. 농사가 아니라 농업이 문제지라. 국방이나 농업이나 똑겉이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근디 왜 군인하고 무기는 신경 쓰면서 농사는 알아서 하라는 거냐구요”
답답한 얘기는 조금 더 이어졌다. 그러다가 아까 마을회관에서 어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막내 데려 온댔더니 엄니들이 한 말씀 하시더라.” “뭐라고 그러시든 가요?” 그 톤 그대로 말해 줬다.
“왜 그렇게 겁이 없댜. 돈 벌러 내려 온다구? 얼씬두 말라구 혀! 큰일나...”
원유헌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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