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늘 폐부를 관통하는 명문(名文)을 구사했다. 그의 저서에는 특별히 밑줄을 긋기 겸연쩍을 정도로 자주 압도적인 격언, 미문이 담겼고, 서화집에 빼곡히 적힌 곡진한 문장은 때로는 서늘하게, 때로는 뜨겁게 독자들의 가슴을 식히고 달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88)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329쪽ㆍ1985년 8월 계수님께)
“옥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섬뜩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있으면서도 걷지 못하는 우리들의 다리를 깨닫게 하는 그 글귀는 단단한 눈뭉치가 되어 이마를 때립니다. 내일 모레가 2월 초하루. 눈사람도 어디론가 가고 없고 먼 데서 봄이 오는 기척이 들립니다.”(388쪽ㆍ1988년 1월 계수님께)
‘나무야 나무야’ (1996)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29쪽)
“돌이켜보면 강물의 치열함도 사실은 강물의 본성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험준한 계곡과 가파른 땅으로 인하여 그렇게 달려왔을 뿐입니다. 강물의 본성은 오히려 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과 평화인지도 모릅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본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며 가장 평화로운 물이기 때문입니다.(…)평화는 평등과 조화이며 갇혀 있는 우리의 이성과 역량을 해방하여 겨레의 자존(自尊) 을 지키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함으로써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갈 수 있게 하는 자유(自由) 그 자체입니다.” (156쪽)
‘더불어 숲’(1998)
“‘우리는 이겼다’는 외침과 ‘나는 이겼다’는 외침 사이에는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가 우리들로 하여금 쓸쓸한 감상에 젖게 하는 까닭은 아직도 ‘내’가 ‘우리’를 이겨야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철학이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46쪽)
“소수의 그룹이나 개인에게 전유된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모든 민중들에 의해서 이상이 공유되고 있는 혁명은 비록 실패로 끝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본질에 있어서 승리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의 실패는 그대로 역사가 되고 역사의 반성이 되어 이윽고 역사의 다음 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139~140쪽)
‘처음처럼’(2007)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18쪽)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 (50쪽)
‘담론’ (2015)
“내가 징역살이에서 터득한 인간학이 있다면 모든 사람을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유심히 봅니다. 그 사람의 인생사를 경청하는 것을 최고의 ‘독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번에 나누어서라도 가능하면 끝까지 다 듣습니다.(…)유심히 주목하면 하찮은 삶도 멋진 예술이 됩니다.(…)예술의 본령은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입니다.”(251~252쪽)
“‘씨 과실을 먹지 않는 것’은 지혜이며 동시에 교훈입니다. 씨 과실은 새봄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한 세월을 보여줍니다. 한 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찹니다.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 내는 지혜이며 교훈입니다.”(420쪽)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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