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어둑한 새벽 뒷산에 오르자니 발이 천근만근이다. 터벅터벅, 더디고 굼뜬 걸음을 얼마나 걸었을까. 한순간 앞이 환해 고개를 든다. 맞은편 산 구름 속에서 햇살이 쏟아진다. 해가 뜨다니, 땅에 닿을 듯 늘어졌던 두 팔이 번쩍 들린다. 해님 만세! 어제의 어둠과 혼돈을 평정하고 새 아침을 건설한 해님 만세! 이제 곧 어제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지독한 혼돈이 시작될 테지만, 그래도 만세 만만세 해님 만세다.
아민 그레더의 그림책 ‘섬’ 속표지에서도 해가 뜬다. 그리고 새로운 혼돈이 펼쳐진다. 시커먼 파도가 굽이굽이 물이랑 너머 수평선을 불그레 물들이는 어느 날 아침, 섬 사람들은 해변에서 낯선 남자를 발견한다. 기묘하게 왜소한 몸집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남자는 광활한 펼침 장면의 오른쪽 아래 자기 그림자와 함께 어정쩡하게 서있을 뿐인데도 가슴 철렁하게 독자의 눈을 찌른다.
자기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나 자기들과 아주 똑같지 않다고 해서 위험하게 여기고, 자기들 세계를 침범하고 위협한다고 여기는 심상의 이미지 그대로 그려진 이 낯선 타자는 살아있는 유령 같기도 하고 고깃덩어리 같기도 하다. 이 존재에 대한 터무니없는 과잉 반응은 거대한 덩치의 섬 사람들이 몰려나와 쇠스랑이며 갈퀴 따위를 쳐든 채 눈을 흡뜨고 코를 벌렁이며 짐승처럼 씩씩대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과장되고도 사실적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인간의 약점과 현실 세계의 다양한 아이러니를 떠올리게 한다.
낯선 사람을 당장 바다로 내쫓아야 한다는 섬 사람들 다수의 주장에 대해, 그랬다간 파도에 휩쓸려 죽을 게 뻔하고 평생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되리라며 어부 하나가 팽팽히 맞선다. 일말의 이성에 의해 섬 사람들은 낯선 남자를 살려두기로 하지만 살려둘 뿐 돌보지는 않기로 하고, 예전에 짐승 우리로 썼던 섬의 구석진 곳에 밀어 넣고 문을 못질한다. 그러고는 배 불리 먹고 마시는 안전한 일상으로 돌아가 그 성가신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굶주림에 지친 낯선 남자가 염소 우리를 빠져 나와 마을에 나타났을 때의 모습을 작가는 직접 그리지 않는다. 케테 콜비츠 식 그림체와 뭉크 식 ‘절규’에 의한 마을 노파의 경악을 통해 보여준다. 섬 사람들은 다시 혼돈에 휩싸인다. 그들 스스로 빚어낸 공포와 불안이 그나마 남아있던 이성을 먹어치운다. 마침내 낯선 남자를 꽁꽁 묶어 그가 타고 왔던 뗏목에 태워 바다로 내보내고, 바다에서 나는 어떤 산물도 먹지 않기로 하고, 높이높이 장벽을 쌓고, ‘섬 바깥에 있는 누구도 섬 안의 소식을 들을 수 없도록’ 날아다니는 새도 쏘아 죽인다.
작가 아민 그레더는 건축과 그래픽디자인ㆍ일러스트레이션을 두루 전공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라고 부제를 단 이 책 ‘섬’을 비롯해 2005년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작 ‘별이 된 큰곰’ 등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돕는 그림책을 꾸준히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에게 온 사람이라고 모두 먹여 살릴 수는 없어. 그렇게 하면 곧 우리 자신이 굶주리게 될 거야.’ 굶주린 낯선 남자에게 음식을 나눠주자는 소수 양심에게 식료품 가게 주인이 하는 말은 최근의 난민 문제며 약자와 빈자를 돌보는 일에 대한 사회적 동의 그대로, 우리 몸 어딘가에 못 박히듯 남는다. 과연 내일도 해가 뜰까?
이상희 시인ㆍ그림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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