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간 3개 대륙 12만km 여행
위대한 순례자 이븐 바투타에 반해
자취 따라간 英 성공회 신자 여행기
아랍,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팀 매킨토시-스미스 지음, 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발행ㆍ544쪽ㆍ2만2,000원
지금부터 700여 년 전인 1325년 6월,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항구도시 탕헤르에서 스물 한 살의 무슬림 청년이 길을 떠난다. ‘가슴 깊이 간직한 순례의 굳은 의지와 성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친한 길동무 하나 없이 혈혈단신으로’ ‘남녀노소,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을 떠나 마치 새가 둥지를 떠나듯’ 나선 여행은 29년이나 이어졌다. 아시아ㆍ아프리카ㆍ유럽의 3대륙에 걸친 장장 12만km의 여정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상 가장 위대한 여행가로 꼽히는 이븐 바투타(1304~1354)의 여행기가 태어난 내력이다. 여행문학의 영원한 고전이자 중세 이슬람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사료다. “여행서적의 걸작이라는 것들은 모두 이븐 바투타의 뒤꿈치에 질질 끌려가는 꼬리일 뿐”이라는 17세기의 어느 책 광고는 과장이 아니다.
이 책을 보고 반한 영국인 성공회 신자가 이븐 바투타를 발자취를 따라 나섰다. 700년 전 그가 본 세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또는 어떻게 바뀌지 않았는지 찾아보려고. 이븐 바투타가 본 것, 먹은 것, 느낀 것, 생각한 것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오늘의 이슬람과 이슬람 사람들을 만났다.
‘아랍,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원제 ‘탕헤르인과 함께한 여행’)는, 그러니까 이븐 바투타와 함께한 이슬람 여행기다. 과거와 현재가 이음새를 눈치챌 겨를 없이 수시로 스미고 섞인다. 이븐 바투타가 공부했던 기도실, 그가 봤던 풍광과 건물, 그가 먹었던 진미들을 직접 체험하고, 그가 외관만 보고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던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당시는 이슬람 모스크였다)도 찾아간다.
예멘을 제2의 조국 삼아 살고 있는 저자, 팀 매킨토시-스미스는 예멘 수도 사나의 코딱지 만한 책방에서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처음 보고 푹 빠졌다.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여행가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게 창피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반한 정도가 아니라 ‘중독’ 돼서 일을 저질렀다.
이븐 바투타가 방문한 나라는 지금의 지도로 볼 때 40개가 넘는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말과 노새, 낙타, 소달구지, 배, 뗏목을 타거나 걸어서 여행하며 당시에 알려졌던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보았다. 북쪽으로는 러시아 볼가강, 남으로는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동쪽으로는 중국 베이징과 항저우까지 갔다. 사막과 바다와 초원을 가로지르며 세 번을 왕복한 그 길을 전부 답파하려면 비행기로도 여러 해 걸릴 것이다.
저자는 이븐 바투타가 간 초기 구간의 일부인 탕헤르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갔다. 그래도 이야깃거리는 차고 넘친다. 이븐 바투타를 길동무 삼았으니 그럴 수밖에. 이븐 바투타가 여행에서 만난 사람은 여행기에 언급한 이름만도 대략 1,500명. 술탄의 궁정과 카라반의 숙소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펼쳐지는 온갖 장면들, 해적과 폭풍, 난파, 흑사병, 열병 등 이븐 바투타가 겪은 아슬아슬한 사건까지 체험하진 못했지만, 저자가 만난 풍경 역시 무척 다채롭다.
무엇보다 지금 그 곳에 사는 사람들 냄새가 물씬해서 좋다. 사진이 한 장도 없고 작은 삽화(그림 마틴 요먼)만 그것도 몇 컷 안 되게 들어간 책이지만, 저자의 생생한 필치 덕분에 바로 그 자리에서 구경하는 듯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가 방문한 도시와 마을과 거리와 시장들, 거기서 들리는 소음과 코를 간질이는 냄새, 북적대는 인파, 사원과 성당과 무덤 등 명소에서 거듭 확인한 이슬람의 위대한 유산들, 이방인에게 아낌없이 친절과 호의를 베풀던 사람들, 아름답고 쾌활한 여인들, 자부심 넘치고 온화한 남자들, 그리고 이븐 바투타의 후예라 할 수 있는 배낭여행 청년들. 저자는 수많은 사람과 장소에서 이븐 바투타의 자취를 찾아내고 공감하며 유쾌하고 활달하게 글을 썼다. 이븐 바투타가 맛보고 찬양했던 진귀한 요리를 먹는 데 하루를 통째로 바치고 기분 좋게 트림을 하면서 어슬렁어슬렁 숙소로 돌아오는 저자를 따라다니다 보면 독자들도 덩달아 배가 부르다. 한 번 펼치면 손에서 놓기 싫을 만큼 재미있는 책이다.
700년의 세월을 오가는 흥미로운 여행에서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달라진 세상, 특히 사라지고 파괴되는 것들이다. 시리아의 오늘이 특히 그렇다. 지상 천국처럼 아름답고 융성했던 이븐 바투타 시절의 다마스쿠스는 이제 지옥이나 다름없다. 오랜 내전, 폭격과 파괴, 죽음과 기아가 지배하는 곳이 됐다. 무자비한 테러를 일삼으며 수천 년 된 유적을 망설임없이 폭파해버리는 IS까지 날뛰는 그 땅에서 알라의 영광은 빛이 바랬다.
이븐 바투타가 그토록 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드물게 평화로웠던 14세기의 정세와 이슬람 정신인 형제애 덕분이었다.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어디서든 환대를 받았다. 그런 세계는 어디로 갔는가. IS의 악행 때문에 지금 이슬람은 툭하면 경계와 규탄의 대상이 되어 버렸고, 세계는 더 이상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지 않는다. ‘아랍,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이 책으로 환기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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