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월 15일
1월 15일은 ‘붉은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1871~1919)가 숨진 날이다. 48세의 그는 옛 동지였던 독일 사회민주당(SPD) 우파 집권세력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 뒤 베를린 란트베어 운하의 물 속에 버려졌다. 시신은 5월 31일 떠올랐고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에 안장됐다고 알려져 왔다.
제정 러시아 치하 폴란드의 한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좋은 교육 덕에 폴란드어와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를 익혔다. 중등학교 시절부터 혁명서클에 가담해 반정부 활동을 벌였고,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해 취리히대학서 철학과 법학,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1897년 폴란드 산업발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7세때 위장결혼으로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뒤 사민당에 입당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사회주의운동 국제기구인 제2인터내셔널이 출범하기 1년 전이었다.
20세기 초 요란했던 유럽 좌파 정치ㆍ사회 진영 안에서 그는 언제나 소수였고 그 소수의 전위였다. 유럽 사민주의의 우경화에 저항하며 마르크시즘의 혁명적 전망을 지키고자 했고, 독립투쟁의 방편으로 사회주의의 동력을 활용하던 조국 폴란드의 민족주의를 경계했고, 러시아 혁명 후 레닌과 볼세비키의 대중을 무시한 전횡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애국주의가 판치던 1914년 전쟁 시기 집권 사민당이 제국주의전쟁에 동조해 계급전쟁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이념을 저버리자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스파루타쿠스단’을 결성 1919년 1월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그의 죽음은 인터내셔널의 죽음,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죽음이기도 했다. 그 무렵 유럽은 이미,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 위에서 개인의 자유가 만개할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가장 뜨겁던 ‘혁명’의 열기에 가장 붉었던 그가 스러진 것을 역설이라 해야 할까, 숙명이라 해야 할까.
2009년 독일 언론들은 베를린 자선병원 법의학연구소가 의학사박물관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것으로 보이는 시신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나이가 흡사하고, 물속에 오래 가라앉아 있었고, 로자의 다리를 절게 했던 골관절염 흔적 등이 확인됐다는 거였다. 앞서 매장된 시신의 검시 기록에는 질병과 민병대의 확인사살 총상 기록이 없었다는 점도 언급됐다. 하지만, 확정적인 후속 보도는 없었다. 그가 숨진 직후 브레히트가 쓴 시는 슬픈 예언이 됐다.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그녀의 몸이 쉬는 곳조차 알 수 없으니/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그 때문에 부자들이 그녀를 처형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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