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에도 체감온도가 영하 10도까지 떨어진 지난 8일 강원 춘천시 효자동 강원대 정문 인근 대추나무골에 반가운 손님이 도착했다. 주민들이 ‘연탄 클로스’라 부르는 정해창(56) 춘천연탄은행 대표. 그는 마중을 나온 어르신들에게 “오늘 선물 오는 날이야. 좋으시지? 밥맛 좋은 오대쌀도 갖고 왔는데”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느 새 무표정했던 어르신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찬바람이 불 때면 어김 없이 찾아와 온기를 지펴주는 그는 주민들의 말처럼 산타클로스 같은 존재다.
이날 정 대표와 함께 한 자원봉사자들이 지게를 지고 연탄배달을 시작하자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던 마을에 활기가 넘친다. 나눔의 현장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가 소외된 이웃들과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햇수로 13년째. 정 대표는 춘천에 정착해 목회활동을 시작한 2004년 10월 춘천연탄은행을 만들었다. 사회의 그늘진 곳을 살피는 것이 목회자의 의무란 생각을 갖고 시작한 일. 그래서인지 그는 자신을 ‘연탄 섬김이’라 부른다. “삶의 희망을 내려놓고 변방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죠. 연탄 한 장의 사랑으로 따뜻한 세상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습니다.”
춘천연탄은행이 지원하는 가정은 대체로 기초수급을 받지 못하는 차상위 계층으로 대부분이 어르신들이다. 노인들 대부분이 마땅한 생계수단이 없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한 가정이 겨울을 나기 위해 사용되는 연탄은 500장에서 800장 가량. 추위에 약한 노인들은 더 많은 연탄이 필요하다는 게 정 대표의 설명이다. 이렇게 그는 13년 동안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1만 여 가구에 200만 장 가까운 연탄을 나눠주며 온기를 지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얘기해 달라고 하자 정 대표는 “그 동안 웃을 일도, 가슴 짠한 일도 참 많았다”고 지난 13년의 기억을 되짚었다.
“지난해 겨울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친 다음날이었던 거 같아요. 할머님 혼자 계신 집을 찾았더니, 마지막 남은 연탄 한 장을 갈고 계시더군요. 할머님이 저희를 보시더니 가슴 속 깊이 감춰놨던 울음을 터뜨리시는 거에요.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도 물론 많았다. 어느 날엔가는 삯 바느질로 살아가는 할머니가 1년 동안 모은 돈으로 연탄 1,000장을 마련해 ‘자기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위해 써 달라’며 기부했다고 한다. 정 대표는 “그 때 할머님의 사랑이 너무 무거워 여러 번 들다가 들지 못하고 가슴에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미소를 지었다. 2012년 겨울에는 연탄은행이 후원자를 모집한다는 기사가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이를 본 재미동포 독지가가 정 대표에게 기부할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세상에 아직도 따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바쁜 시간을 쪼개 연탄배달에 나서줬던 어린 학생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음에도 기부를 실천한 자원봉사자 모두가 그에겐 더 없이 소중한 기억을 함께한 사람들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에게 닥친 이번 겨울 사정도 그다지 좋지 않다. 내수경기 위축으로 경제 위기로 후원은 지난해 80% 수준에 그치는 탓이다. 경기가 위축되자 되레 곳간이 빈 지원 대상자가 늘어났다. 때문에 올 겨울에는 후원금이 줄어 외상으로 연탄을 들여다 배달을 해준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 주위를 행복 바이러스가 감싸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지난 13년간 힘들지 않은 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항상 긍정의 마인드를 가지면 그때마다 후원의 손길이 이어져 매년 고비를 넘겨왔다”며 “이것이 우리사회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올해 할 일이 또 하나 생겼다. 다음달 말 춘천 소양로에 문을 여는 무료 급식소인 ‘하늘밥상’을 운영하는 것. 그 동안 춘천에는 저소득층이나 독거노인 등을 위한 무료 급식소가 없어 안타까웠던 마음에 새로 시작하게 된 사업이다.
그는 올 한해 하늘밥상을 매개로 주위에 행복이란 전염병을 퍼뜨린다. 지금은 조금 힘들지만 같이 웃으며 내일을 준비하고, 항상 감사와 배려가 가득한 ‘해피 바이러스’ 전도사가 되려 한다. “물리학에 ‘동조현상’이란 게 있죠. 하나의 진동이 다른 진동과 일치되거나 조화를 이루는 반응. 일상생활도 마찬가지로 행복한 사람들과 만나면 나도 금방 행복에 물들게 됩니다.”
박은성기자 esp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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