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두 곳뿐인 젤라틴 생산회사
경기 안산 삼미산업 해묵은 고민
“규제 풀어달라”간곡한 호소 불구
정부 “형평성 문제로 안돼”말 뿐
해외 이전 경기도서만 10년 새 13곳
“올해 안에 야외 노출된 시설에 지붕을 씌우지 못하면 매출이 반 토막 납니다. 그럼 우리 직원들과 딸린 식구들은 어떻게 합니까?”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지난달 24일 경기 안산시 팔곡일동 삼미산업에서 만난 차상복(54) 상무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위생 강화를 위해 소와 돼지 껍데기 등을 씻는 세척기에 덮개를 해야 하는 해묵은 숙제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만 해도 정부 관계자들을 찾아 수 차례 허리를 숙이며 부탁했지만, 매번 단칼에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세척기 덮개를 씌우지 못한 채 병신년을 맞았다.
삼미산업은 국내에서 두 곳밖에 없는 젤라틴(동물의 껍질, 힘줄, 연골 등을 구성하는 천연단백질인 콜라겐에서 추출하는 단백질) 생산업체다. 국내외 제과, 의약품 제조업체 등에 젤리, 캡슐 코팅제 등의 원료를 공급하며 지난해에만 270여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삼미산업의 올해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생산시설을 국제적인 안전성 기준에 맞추지 않으면, 당장 177억원 이상의 매출 감소를 견뎌내야 할 처지다. 시급한 문제는 야외에 노출돼 있는 세척기 5대(전체 면적 978㎡)에 지붕을 씌우는 것이다.
예전엔 원료처리 단계에선 세척시설이 덮개 없이 밖에 있어도 무방했지만, 10여 년 전부터 국내외 구매기업의 위생점검과 시설 등급판정 기준이 엄격해졌다. 삼미산업은 급기야 지난해 9월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우수원료 의약품제조시설 인증(BGMP)을 아예 반납해야만 했다. 연간 20억~30억원을 수출해왔던 미국의 한 식품회사로부터는 올 6월까지 덮개를 하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는 소리도 들었다.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지만, 마땅한 해법은 아직 없다. 건축과 시설 보수 등을 위해 필요한 비용 110억원을 마련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개발제한구역(GBㆍ그린벨트) 등 규제의 늪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삼미산업이 GB라는 올가미에 얽힌 것은 40년 전이다. 1976년 7월 개발이 한창이던 서울 영등포를 떠나 한적한 안산으로 공장을 옮겨 왔는데 불과 5개월여 만에 공장 터(1만4,231㎡)가 GB로 지정됐고 최대 60%였던 건폐율(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면적 비율)은 개발제한구역특례법(개특법)에 따라 3분의 1인 20%로 줄었다. 당시 공장(바닥면적 4,133㎡) 건폐율이 29%로 새 규정의 상한을 이미 넘어선 터라 시설을 더는 늘릴 수 없게 됐지만, 그렇다고 막 지은 공장을 버리고 다시 터를 이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지정된 GB는 아직도 풀릴 조짐이 없다. 세월이 흘러 사방에 지하철 4호선과 서해안고속도로, 수인산업도로 등이 뚫리고 직선거리로 불과 40~50m 떨어진 곳에는 중고등학교와 빌라, 상업시설이 우후죽순 들어섰지만 정부는 GB 규제를 꽁꽁 싸매고 있다.
삼미산업은 그 동안 세척기에 지붕을 덮기 위해 정부 부처를 찾아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도 당선 이후 ‘손톱밑가시’를 뽑아야 한다고 외쳤지만, 삼미산업에게 돌아오는 건 다른 기업ㆍ지역과의 형평성 때문에 안 된다는 말이었다.
삼미산업은 밖에 노출돼 있는 세척기에 지붕(세로 26m, 가로 43m)만이라도 덮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경기도와 안산시도 삼미산업이 숙원을 해결하면 ‘30여명의 신규 고용과 연간 수출 100억원 확대 등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가 크다’며 GB지정 이전에 설립된 공장만이라도 건폐율을 40%로 인정해 달라고 건의 중이다.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시행령(제84조의2)이 올 연말 말까지 생산녹지지역 등에서 기존 공장의 건폐율을 40%로 한시 허용하고 있는 것과 형평성을 맞추자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지붕을 씌우면 건축물로 인정돼 현행법 위반이라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는 게 경기도의 설명이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건의 내용을 검토 중”이라며 “현장을 실사해 결정하겠다”고 했다.
‘이중삼중’의 수도권 규제를 견디다 못해 국내를 떠나 해외로 이전하는 국내 기업들도 적지 않다.
14일 경기도가 각 지역 상공회의소 등을 통해 파악한 결과에 따르면 최근 10년 새 중국과 베트남 등 해외로 공장을 이전한 기업이 13곳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중국으로 옮긴 기업이 8곳으로 가장 많고 베트남 1곳, 기타 4곳 등이다.
자동차 전자부품을 생산했던 이천 A업체는 부지가 수도권정비계획법상 자연보전권역으로 묶여 증설이 어렵게 되자 중국으로 일부 공정을 이전했다. 김포 B업체도 김포한강신도시 개발로 터전을 빼앗긴 뒤 대체 부지를 찾지 못해 중국으로 옮겼다.
기업들이 외국으로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각종 규제 때문이라는 게 도의 설명이다. 경기도내 31개 시ㆍ군은 수도권정비계획법에 의해 과밀억제권역(14개 시)과 성장관리권역(14개 시ㆍ군), 자연보전권역(8개 시ㆍ군) 등 3개 권역(일부 시ㆍ군 중복)으로 나뉘어 관리되고 있다. 상당수 시ㆍ군이 상수원보호구역(12개 시ㆍ군), 팔당특별대책지역(7개 시ㆍ군), 수변구역(6개 시ㆍ군) 등으로 지정돼 기업은 오염물질 배출기준을 엄격하게 적용 받는 등 중복 규제에 시달리고 있다. 북한과 가까운 접경지역이라는 이유로 군사시설보호구역로 지정된 곳도 적지 않다.
경기도 관계자는 “권역에 따라 공장 신ㆍ증설이 아예 금지되거나 정부, 지자체 혹은 군의 까다로운 심의를 받아야 한다”며 “수도권이라는 이유로 개별법령이 차별하는 사례마저 있다 보니 세제혜택도 받고 규제까지 없는 중국이나 동남아로 옮기는 기업이 늘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명식기자 gija@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