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피해를 당한 70대 할머니가 사기범에게 줄 돈을 옮기는 것을 경찰이 돕고도 피해를 막지 못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 돈은 할머니의 남편이 남긴 유산이었다.
13일 경찰에 따르면 8일 오후 2시 30분쯤 인천 남부경찰서 숭의지구대에 “적금 4,000만원을 찾은 고객이 안전하게 집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인근 은행 직원의 요청이 접수됐다.
요청을 받은 지구대 경찰관 2명은 은행 앞에서 기다리던 김모(72·여)씨를 만났다. 김씨는 거액을 찾은 이유를 묻는 경찰에 “(자신의) 심장병 치료비로 쓸 돈”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은 김씨가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경기 부천시의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치료 사실을 파악한 뒤에 김씨와 동행해 안전한 귀가를 도왔다.
하지만 경찰이 김씨와 함께 옮긴 이 돈은 치료비로 사용되기는커녕 보이스피싱 사기범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김씨는 이날 다른 은행에서 찾은 1,000만원까지 모두 5,000만원을 집 인근 공원에서 금융감독원을 사칭한 사기범에게 넘겨줬다. 이날 오후에는 또 다른 은행에서 찾은 5,000만원도 사기를 당했다. 김씨는 사기범이 시키는 대로 집 안 세탁기에 돈을 넣고 집 열쇠는 우편함에 둔 채 집을 비웠고 이 돈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보이스피싱 피해 사실은 김씨가 11일 오전 11시쯤 보이스피싱에 속아 남구 도화동의 한 은행을 찾으면서 드러났다. 당시 김씨는 4,000만원을 또 인출하려고 했으나 이를 수상히 여긴 은행 직원이 보이스피싱을 의심해 경찰에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관은 김씨가 보이스피싱을 당한 사실을 밝혀냈다.
김씨는 경찰에 “금감원 직원이라는 사람이 전화해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은행에서 돈을 모두 인출해두면 안전하게 보관해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김씨가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한 1억원은 남편의 유산으로 확인됐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피해가 아닌지) 자세하게 확인해봤어야 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경찰은 김씨 집 인근 폐쇄회로(CC)TV 영상 등을 토대로 보이스피싱 용의자를 뒤쫓고 있다.
이환직기자 slamhj@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