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이면 운세를 본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운세라도 보지 않으면 좀처럼 신년 기분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친구의 페이스북 링크를 타고 들어간 어느 운세 사이트가 예언한 2016년 금정연 님의 운세는 이렇게 시작한다.
“금년은 이름 석자를 크게 날리고 운수가 형통하니 반드시 일에 성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일하는 가운데 어려움도 따르나 끝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귀인을 만나 서로 도와주며 의리까지 쌓을 수 있는 즐거운 해가 연출될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미신적인 사람이 아니다. 듣기 좋은 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신년 운세가 내게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해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읽기를 직업으로 삼은 후 무언가를 읽으며 이렇게 즐거웠던 적도 그리 많지는 않다. 한 마디로 “얻으려고 하면 얻어지고 구하려고 하면 구해 질 운세”라는 나의 2016년은 다음과 같은 감탄문으로 끝난다. “나의 재주로 남을 도와주고 나의 이익도 챙기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물론 모든 점괘가 그렇듯 듣기 좋은 소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쓰기를 직업으로 삼은 후 나는 약간의 쓴 소리는 언제나 유용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 경우 “이성을 너무 가까이 하면 가정에 불화가 생긴다”는 문장은 단순히 구색을 맞추기 위한 문장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라는 문장과 다를 게 없다. 반면 “밤거리를 조심해야 하고 일찍 귀가하거나 유흥을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는 좋은 소리를 더욱 듣기 좋게 만드는 문장이다. 수박에 소금을 조금 치면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밤거리를 조심하고 일찍 귀가하고 유흥을 멀리하기만 하면 점괘 그대로 만사형통할 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2016년에는 밤거리를 조심하기로 했다. 신년 운세를 세 번 정독한 끝에 냉철하게 내린 결론이다. 흔히 파스칼의 내기라고 불리는 논증을 통해 파스칼은 신을 믿는 게 믿지 않는 것보다 언제나 더 낫다고 주장했는데, 신이 있으면 좋은 거고 없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운세도 마찬가지다. 맞으면 좋은 거고 맞지 않는다고 해도 손해 볼 건 없다. 게다가 밤거리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슬슬 뒤통수가 간지러운 참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신년 운세를 읽으며 기분도 좋아지고 동시에 새해 다짐도 한 셈이다. 최근 내가 읽은 어떤 글도 하지 못한 일을, 누가 썼는지도 모를 신년 운세가 해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내가 쓰는 글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나는 서평가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쓴 책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지만 결과적으로는 작가와 독자들의 비위를 거스르기 일쑤다. 뒤통수가 간지러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가뜩이나 퍽퍽한 모두의 삶에 싫은 소리까지 더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 2016년에는 모두가 기분 좋을 수 있는 글을 쓰자.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 마디의 위로다. 그것이야말로 “이름 석자를 크게 날리고 운수가 형통”할 수 있는 길이다! 나는 새롭게 다짐했고 이 글은 그런 다짐 속에서 쓰일 뻔했다. 운세를 보기 위해 내가 입력한 생년월일이 실제와 다른 주민등록상의 생년월일이라는 사실을 내가 뒤늦게 눈치 채지 못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는 내 실제 생년월일을 넣어 2016년의 운세를 다시 확인했다. 그건 다음과 같은 운세였고, 나는 그냥 하던 대로 하기로 했다.
“주변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재되어 있으니 힘겨운 시름이 예상됩니다. 주변에 도움을 구할 곳도 없으니 혼자서 극복해 나가야 할 운입니다. 일의 시작은 있으나 진행에 많은 장애물들이 있으리니 원만한 결과를 얻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금정연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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