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30년 경력을 가진 한 배우가 방송을 떠나겠다며 은퇴 선언을 하겠다는 것이다. 다소 황당한 전화였지만 그에겐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한 방송사의 공채 탤런트 출신인 그는 크든 작든 역할에 상관없이 방송사에서 불러주면 언제든 달려갔다고 했다. 1980, 90년대 드라마의 주ㆍ조연으로 전성기를 누린 적도 있지만 2000년대에는 단역으로 전전했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일이 뚝 끊겼다고 했다.
다시 연기가 하고 싶어 방송사를 찾아 다녔지만 돌아온 건 모멸감과 환멸감이었기에 연예계를 버릴 결심을 했다며 지금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중이라고 했다. 술 한 잔 걸친 듯한 그의 음성은 은퇴 선언을 하겠다는 충격 고백보다 자신의 하소연을 마냥 풀어놓을 그 누군가가 필요한 듯 보였다.
방영할 때마다 큰 이슈를 불러 일으키는 tvN ‘응답하라’ 시리즈에는 유명 배우가 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명의 배우들이 현실 속 우리를 대변하듯 연기하면서 더 큰 공감을 샀다. 성동일과 이일화를 제외하면 그간 ‘응답하라 1997’(응칠) ‘응답하라 1994’(응사) ‘응답하라 1988’(응팔)은 진흙 속 진주 같은 배우들을 보는 재미가 더 쏠쏠했다.
‘응칠’는 정은지, 서인국, 임시완 등 가수 출신 배우들로 신선한 자극이 됐으며,‘응사’는 정우, 유연석, 김성균 등 무명이 길었던 배우들이 재평가 되는 계기가 됐고, ‘응팔’은 류준열, 류혜영, 안재홍 등 독립영화에서 활동하던 신인 배우들을 과감하게 기용해 시청자들의 눈을 환기시켰다.
몸값 높은 톱스타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연기력과 중견 배우들의 드라마 겹치기 출연으로 피로감을 느꼈을 시청자들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보석 같은 배우들의 열연이 즐겁기만 하다.
불륜이라는 막장 소재에도 불구하고 호평을 받은 JTBC ‘밀회’와 ‘아내의 자격’도 실은 무명 배우들의 호연이 숨어 있다. 박혁권, 장소연, 길해연, 백지원 등 연기파 배우들의 기용이 신의 한 수였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응답하라’시리즈의 신원호 PD와 ‘밀회’의 안판석 PD는 직접 배우들을 찾아 다녔다. 신 PD는 ‘바람’ 등 영화를 통해, 안 PD는 직접 대학로 연극 공연을 보며 배우들을 영입했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새로운 인물들로 차린 밥상은 일단 그 자체만으로 신선했고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럼에도 현 방송가는 톱스타가 있는 대형기획사의 배우들을 선호하고, 일부 PD와 기획사들간의 고질적인 유착관계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신인이나 무명 배우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하물며 연기력이 보장되는 30년차 배우가 스스로 문을 두드리는데도 눈 깜짝하는 이가 없다. 연기하고 싶다고 울분을 토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 지금 방송계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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