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 연기자로 살아오신 백성희(白星嬉)선생이 지난 8일 밤 타계했다. 선생과 쌍벽이던 장민호 선생도 몇 년 전 세상을 떠났으니, 한국 현대극의 일 막이 이렇게 종결되는가 싶다. 검열 논쟁 등 한국 연극의 행보가 위태로운 시절이라 선생을 떠나 보내는 마음이 송구하고 착잡하다.
선생은 연극이라는 개념이 태동하던 해방 전부터 연기 인생을 시작하셨고, 1950년에 국립극단이 창단하자 창립단원으로 출발해 원로단원까지 평생을 연극 연기자로 헌신했다. 전쟁이라는 굴곡진 역사 속에서도 연극을 놓지 않았고, 국립극단장 시절에는 공무원들을 설득하여 창작극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며 벽 높은 국립극단에 소장 세대 작가와 연출가를 끌어들였다. 선생의 삶과 노력은 국립극단과 한국 연극의 한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2002년 ‘강 건너 저편에’라는 한일 합작 연극에서 선생과 함께 작업한 경험이 있다. 도쿄와 서울을 오가는 피곤한 일정이라 공연장이 달라지면 배우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곧잘 소리가 뭉개졌는데, 그 무렵 70대였던 선생은 어렵지 않게 그 극장에 맞는 목소리를 찾아냈다. “철의 목소리”라는 별명처럼 타고난 목소리인 것은 풍문으로 알고 있었지만, 특별히 소리를 지르거나 연기를 과장하지 않고서도 토월극장의 뒷자리까지 전달되던 그 품격 있는 목소리와 연기라니! 그 목소리에는 선배 세대들이 스스로 지키고 단련해온 단단한 자존심과 내공 같은 것이 있었다.
더 인상적인 것은 선생의 열린 태도였다. 햇병아리에 가까운 후배가 쓴 작품이라 어쭙잖아 보였을 법도 한데, 선생은 신기할 정도로 아무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가르치는 대신 경청하셨고 젊은 예술가들의 의도를 격조 있게 소화해 주셨다. 선생이 없는 그 작품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유연하고 열린 태도로 당신은 한평생 창작극과 번역극, 사실주의극과 아닌 것들, 주인공만이 아니라 작은 단역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작품과 인물을 수용하고 창조하며 연기자로서의 운명을 살았을 것이다.
고개 들어 소통이 사라진 한국 연극계를 들여다본다. 불통과 불신의 구조 속에 현장 예술가와 제도의 골은 깊어가고, 국ㆍ공립극장의 비대화와 민간 연극의 위축이 아슬아슬한 대칭축을 이룬다. 더 척박했던 시절, 모두가 모여 연극의 불꽃을 피우려고 했던 노력과 열정들은 어디로 갔을까. 선생의 말처럼 “연극이란 사람의 모임으로부터 출발하는 장르”인데, 왜 사람들이 대립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있는가.
선생님. 날씨가 매섭습니다. 어쩌자고 이렇게 춥고 매서운 날씨에 길을 나서십니까. 황망함과 그리움으로, 그리고 몸 둘 바 없는 죄송함으로 한국 연극의 대모였던 당신을 보냅니다. 부디 평안히 영면하십시오.
김명화 극작가ㆍ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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