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부터 손 글씨 편지를 쓰기 시작하기로 했다. 가방에 엽서를 넣고 다니며 생각날 때마다 가끔 여러 사람들에게 간단한 기별 적어 보내기는 했지만 새해에는 ‘고전적인 편지지’에 두어 장 이런저런 생각들 담아 써서 하얀 봉투에 곱게 담아 보낸다. 작년에는 한지로 된 빈 책 하나에 담아 썼더니 마치 책 한 권 쓴 느낌도 들었다. 사는 게 너무 밭고 빨라서 그렇게 천천히 그리고 조금이라도 온기 느끼며 교감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결코 쉬운 일 아니다. 워낙 컴퓨터 자판이나 스마트폰 자판에 익숙해서 이제는 글씨를 쓰는 게 느리고 불편하다. 심지어 문장 하나를 쓰는데도 시간이 더 걸리는 건 고사하고 생각의 속도까지 순응해서 느리게 쓰면 다 담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도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글은 전신이 함께 반응해서 살갑다. 단순히 손가락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손까지 이어지는 모든 근육과 신경이 동원된다. 그러니 손편지는 머리와 손가락의 반응이 아니라 전신과 전심의 전체적 반응이다. 그걸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뭐 그리 바쁘다고 뭐 그리 편리하다고 정신 없이 살고 있는지, 돌아보니 참 허망하기도 하다.
편지 한 통 제법 내용 담아 쓰려면 30분에서 1시간쯤은 족히 걸린다. 글감이나 영감이 딱 떠오르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책상에 앉아 무엇을 쓸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글 쓰는 시간 정도 걸릴 때도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사람만을 위해 한두 시간쯤은 오롯이 할애해야 한다. 그건 그 사람에 대한 몰입이고 깊은 사랑 그 자체다. 받는 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때론 책상 위에 비장하게(?) 촛불 하나 밝히고 쓰면 편지지에는 글씨보다 손 그림자가 먼저 접속한다. 그러면 글씨뿐 아니라 손의 감촉까지 담기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사람들이 빠져드는 건 향수다. 이제는 사라져 북촌이니 서촌이니 하는 관광지로만 남아 박제된 골목길과 그 공간에서 부대끼던 사람들의 느린 삶들이 그리워서 그럴 것이다. 길이 주름진 것이 골목이라는 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와 사랑이 있다는 은유다. 그 당시에는 최첨단이라 여겼던 ‘삐삐’나 ‘시티폰’ 등을 지금 쓰라면 속 터져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이 환상이었고 최첨단의 속도였다. 이제 그걸 그리워하는 건 물론 그 당시의 각자의 시간들이겠지만 그 속도마저 부드러운 곡선으로 느껴지는 살가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더 애틋한 설렘을 누리기 위해 편지를 손으로 써서 우체통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오롯이 누리면 된다.
청마 유치환과 운정 이영도의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읽다보면 편지가 얼마나 살갑고 애틋한지 새삼 느낀다. 청마는 아침마다 출근할 때 우체국에 들렀다. 그리고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하였다고 고백했다. 밤의 심지를 돋우며 연인을 향해 몰입했던 그 행복을 되새김하는, 우체국까지 가는 시간은 오로지 편지를 쓴 주인공에게만 허락된 행복이었을 것이다.
사는 게 너무 바쁘다. 그렇다고 그 바쁨이 삶을 농밀하게 혹은 충실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습관처럼 그리고 가속도까지 붙어 갈수록 더 바빠지는 삶, 새로운 기계가 나올 때마다 속도는 더욱 더 빨라지고 우리는 그 속도에 함몰된다. 잠시 멈춰서 그 속도에 저항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손편지는 불편함이 아니라 선물이다. 삶의 농밀함과 관계의 내밀함이 담뿍 담긴 편지는 느림이 주는 혜택이다.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지금쯤 도착했을까 궁금한 것만으로 하루는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따사롭다. 그러니 기꺼이 느리게 살고 싶다. 느림은 속도의 낙오가 아니라 시간을 더 오래 붙잡아두는 누림이다. 손목에 찬 시계가 그저 일정한 속도의 시간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 그 자체에 대한 긴장과 이완일 수 있게 하는 것은 편지가 주는 덤이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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