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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병(病) 소년’의 일탈, 과연 미국만의 얘기일까

입력
2016.01.1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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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불안 대중… “나도 저렇게 살았으면” 부자병 환자 ‘동경’

한 ‘부자병(病) 소년’의 탈선행각으로 지금 미국이 들끓고 있다. 부자병은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병적 정신 증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부자병은 물질의 노예가 된 부모의 잘못된 자녀 양육의 산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부자병 증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부자병(病) 소년’의 탈선행각으로 지금 미국이 들끓고 있다. 부자병은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병적 정신 증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부자병은 물질의 노예가 된 부모의 잘못된 자녀 양육의 산물”이라고 입을 모은다. 부자병 증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요즘 ‘부자병(病) 소년’의 탈선행각으로 미국이 시끄럽다. 사건의 주인공은 이선 카우치(18). 카우치는 지난 2013년 음주운전으로 4명을 사망케 한 뒤 선 법정에서 “삶이 너무 풍요로워 감정통제가 안 되는 ‘부자병’을 앓고 있다”고 호소, 징역형 대신 보호관찰 10년형의 관대한 처분을 받았다. 그의 일탈은 끝이 아니었다. 법원 명령을 어기고 술을 마셨고 게임하는 동영상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경찰 추적을 받자 지난해 말 멕시코로 달아났다 붙잡혔다. 그는 멕시코 ‘은신’ 중에서도 성인클럽을 들락거렸고 검거 뒤엔 현지 거물 변호사를 내세워 송환을 저지하고 나서 사회적 공분을 샀다.

카우치가 자신이 앓고 있다고 법정에서 주장한 부자병은 이른바 ‘어플루엔자(affluenza)’다. 풍요하다는 뜻의 ‘어플루언트(affluent)’와 ‘인플루엔자(influenza)’의 합성어로, 미국 PBS방송 PD 그라프(J. D. Graaf)와 환경과학자 왠(D. Wann), 듀크대 네일러(T. N. Naylor) 교수 등이 2001년 함께 펴낸 동명의 책에서 유래됐다.

부자병은 현 의학 분류체계에 질병으로 정의돼 있지 않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이는 풍요로워지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다 과중한 업무나 빚, 스트레스 등에 짓눌리고 인간관계에서까지 파국을 맞게 되는 일련의 정신적 증상을 일컫는다. 현 질병 분류에서 가장 근접한 증상을 꼽는다면 품행장애와 충동ㆍ감정조절 장애다. 김태 강동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카우치의 경우 징역형을 면하기 위해 변호인단이 심리학자를 고용해 부자병을 호소한 것”이라며 “의학적으로 카우치는 품행장애 환자로 진단할 수 있다”고 했다. 품행장애는 타인의 기본 권리나 나이에 걸맞는 사회적 규칙을 반복적으로, 지속적으로 위반하는 정신장애로, 주로 청소년기에 발병한다.

“과소비, 과잉보호… 대한민국도 예외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오른다. 부자병은 미국에 국한된 현상일까?

이에 대해 국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우리사회에도 부자병을 앓는 사람들이 적지않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재벌가 스캔들이 그 단면이다. 회사 인수합병 과정에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탱크로리 기사를 야구방망이로 때린 뒤 2,000만원을 건넨 ‘맷값 폭행’, 2014년 말 국내외를 뜨겁게 달군 ‘땅콩회항’ 등 사건 말이다.

부자병은 비단 재벌가에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어려서부터 과소비와 과잉보호 속에서 자란 청소년 사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고 전문의들은 전한다. 서울 강남에 사는 중학교 2학년 A양이 그런 경우.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서 성장한 A양은 학교 친구 사이에서 ‘왕따’가 돼 현재 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치료 받고 있다. A양 담당의는 “과소비에 중독된 어머니로부터 원하는 건 뭐든 얻을 수 있던 A양은 친구들에게 입은 옷, 핸드폰, 돈을 자랑하다 따돌림을 받았다”며 “치료 초기에는 자신이 왜 왕따가 됐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카우치와 A양 사례에서 보듯 배금주의(拜金主義)는 부자병에 걸린 사람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이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돈이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 바로 ‘유전무죄(有錢無罪)’다. 이런 심리가 더 나아가고 강화되면 결국 공공의 안전을 해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탈법이나 불법에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도덕 불감증의 상태에까지 이를 수 있다. 비난의 대상에서 사회적 단죄 대상으로 커지는 것이다. 이병철 한림대한강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런 정신 상태에 도달하면 과시욕과 특권의식이 작동해 마약, 성범죄, 폭행 등도 서슴지 않는다”며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도덕, 양심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인의 시선”이라고 말했다.

부자병이 다른 질병과 구별되는 지점은 이 병이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거다. 개인의 일탈을 사회적 범죄로 키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키맨’은 바로 그 부모이기 때문이다. 즉, 부자병 초기에는 폭력, 도박, 절도 등 소소한 탈선에 머물지만 이것이 부모의 돈이나 배경 덕으로 아무런 뒤탈 없이 넘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성폭력이나 마약, 살인 등 대형범죄를 저지른다는 설명이다.

돈만 좇는 속물의 타락… 부모가 배후

일탈을 일삼는 청소년들의 배후에는 자식보다 더 심한 부자병을 앓는 부모들이 있다고 전문의들은 입을 모은다. 김태 강동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정작 부자병을 앓는 사람은 자식이 아닌 그 부모”라면서 “카우치 같은 이들은 부자병 부모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꼬집었다. 정동청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아이들을 보면 잘못된 양육으로 성격적으로 장애가 생긴 이들이 많다”고 했다. 김한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행복드림의원 원장)는 “부모가 과소비를 하고, 과잉보호를 통해 아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조절력을 상실해 충동조절이나 감정조절을 상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카우치 부친은 카우치가 13살 때 학교에 차를 몰고 가게 했고 학교장이 이를 질책하자 “이런 식으로 내 아이를 혼낸다면 학교를 사버리겠다”고 협박하며 아들을 두둔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베테랑’ 속 주인공은 부자병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분)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성매매 특별법 위반 ▦음주 및 과속 ▦공공질서 파손 ▦공무집행 방해 ▦경찰관 살인교사 ▦경찰폭행 ▦살인교사 등 범죄를 밥먹듯 저지른다. 또 그는 폭력, 파괴, 동물학대 등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 삶이 너무 풍요로워 감정통제가 안 된다고 주장한 현실의 카우치와 영화속 조태오의 모습은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영화는 돈에 매수되지 않은 정직한 경찰관이 재벌 3세를 체포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만약 재판에서 조태오 변호인단이 카우치처럼 ‘부자병’을 호소한다면 징역형을 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 변호사는 “만일 재벌 아버지가 변호인단을 꾸려 아들이 부자병에 걸린 환자라고 몰고 가면 카우치처럼 징역형을 면할 수 있다”면서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않는다는 ‘형법 제10조항’이 악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진자의 일탈 선망하는 기현상도 문제

사회적 질타 대상이 종종 거꾸로 선망의 대상으로 돌변한다는 점은 부자병에서 웃지 못할 아이러니다. 일부 ‘금수저’들의 일탈행위는 심심찮게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실제 마땅한 죗값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또 재벌총수들은 횡령 등 범죄를 저질러도 ‘경제발전’이란 명목 하에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이 예사 아닌가. 이에 반해 돈 없고 ‘빽’ 없는 보통 사람들은 머리로는 이들의 범죄행각을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들이 휘두르는 부와 권력을 부러워하는 이중적 사고를 하게 된다고 전문의들은 말한다. 이병철 교수는 “물질적 가치가 세상 그 어떤 가치보다 우위를 점한 사회가 대한민국”이라면서 “대중은 자신도 모르게 범죄행위에 대한 비판보다 ‘나도 저렇게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동경을 품게 된다”고 했다.

배금주의와 빈부격차, 입시 위주 교육 등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부자병 신드롬은 우리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부자병은 사회 가치가 돈으로 집중되면서도 야기된 현상”이라며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직장, 치솟는 집값과 교육비 등으로 대중의 불안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에 부자병에 걸린 이들을 선망하는 기현상은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김혜영 숙명여대 정책산업대학원 교수는 “재벌가 자녀가 아니더라도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허용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이 많다”면서 “청소년기에 타인에 대한 배려, 도덕적 가치 등을 상실하면 커서 불법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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