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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기지로 찢긴 강정 ‘책마을’로 거듭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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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기지로 찢긴 강정 ‘책마을’로 거듭날까

입력
2016.01.11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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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포구 방파제에서 바라본 해군기지 건설현장. 기지와 그 부속건물까지 완공을 앞둔 상황이지만 마을 곳곳엔 여전히 기지를 반대하는 깃발과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강정포구 방파제에서 바라본 해군기지 건설현장. 기지와 그 부속건물까지 완공을 앞둔 상황이지만 마을 곳곳엔 여전히 기지를 반대하는 깃발과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제주엔 ‘괜당’ 문화라는 게 있습니다. 친척이나 이웃 간에 믿고 의지하고, 필요할 땐 묻지도 않고 돈을 빌려주는 끈끈한 공동체 문화예요. 해군기지가 들어온 후 강정은 괜당 문화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습니다. 삼촌과 조카가 등을 돌리고, 반대파와 찬성파가 가는 슈퍼마켓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해군과 그 가족이 들어오면 공동체가 완전히 분열하는 건 시간문제겠죠.”(함성호 시인)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가 완공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사업단에 따르면 현재 공정률 98%여서 조만간 준공식이 열린다. 기지 설립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고 주민들은 이제 해군기지 이후의 삶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다. 2007년 국방부가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설립지로 확정 발표한 이후 하루도 빠짐 없이 전쟁을 치렀던 강정은 이제 다시 한번 중대한 기로에 섰다.

‘군복차림 해군, 해군차량 진입 엄금’

10일 강정포구로 진입하는 골목 어귀에 현수막이 펄럭거렸다. 포구 방파제에서 바라본 해군기지 부지에선 크레인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방파제는 이미 완공됐고 해군과 그 가족들이 들어와 살 관사 건물도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마을 주민들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꽁꽁 얼어 붙어 있다.

국방부가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후보로 발표한 건 2007년 4월. 마을 주민 1,900명 중 87명이 참석한 회의에서 날치기로 유치 건이 통과된 뒤 주민들은 재투표, 거리 농성, 서명 운동 등으로 맞섰지만 공권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민 72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2012년 3월엔 절대보존지역으로 지정됐던 구럼비 바위가 폭파됐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정문 앞 나무에 주민들이 해군기지 설립 반대의 염원을 담아 노란 리본을 매달았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장 정문. 정문 앞 나무에 주민들이 해군기지 설립 반대의 염원을 담아 노란 리본을 매달았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문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막연한 위기감으로 2012년 겨울 함성호 시인을 위시한 소설가, 시인들이 제주로 내려갔고 이듬해 강정평화책마을위원회가 설립됐다. 강정을 책 마을로 바꾸겠다는 문인들의 선언은 당시 현지 활동가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할 마당에 평화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이미 타협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성호 시인은 “처음부터 30년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싸움”이라고 말한다.

“한겨울에 레미콘 앞에 눕는 활동가들 눈엔 우리의 저항이 너무 안이해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제주 4ㆍ3 항쟁의 연장선에서 강정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4ㆍ3이 잊혀지면 강정도 잊혀지고 세월호도 기억에서 사라질 겁니다. 저항의 거점을 마련하고 매년 새로운 행사를 기획해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촉구하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어요.”

2013년 3월엔 작가 400여명과 마을 주민들의 협업으로 평화책방과 평화센터가 들어섰다. 평화책방은 주민들이 들러 책을 읽고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고, 평화센터는 다양한 행사를 수용하기 위한 장소다. 평화책방으로 탄력을 받으면서 규모를 키우자는 내부 의견이 나와, 그 해 10월엔 ‘십만대권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서울에서 배로 책 3만5,000여권을 들여와 강정 포구 앞에 세운 컨테이너 도서관과 폐가전으로 만든 이동식 거리 서가에 채워 넣었다. 그러나 의욕이 앞선 탓인지 미처 수납하지 못한 책들이 썩고 컨테이너가 녹스는 문제가 발생하면서 당시 마을위원장으로부터 활동을 자제해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마을 주민 자서전 만들기, 생태적 건축모델 기획 등도 무기한 보류됐다.

2013년 함성호 시인 등 문인들이 강정마을에 세운 평화책방. 주민들이 사랑방처럼 들러 책을 읽고 차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2013년 함성호 시인 등 문인들이 강정마을에 세운 평화책방. 주민들이 사랑방처럼 들러 책을 읽고 차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이런 가운데 지난 10일부터 사흘 간 강정에서는 ‘2016 생명 평화 문학 in 제주’ 행사가 열리고 있다. 강정을 지키려는 문인들이 평화책방 이후 다시 떼는 첫 발이다. 전국의 대학생 31명을 대상으로 제주청소년수련원과 강정마을 일대에서 강연을 열어 강정의 실태를 알리고 작가들과 1대 1 멘토링을 통해 소통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김근, 김선재, 박성원, 백가흠, 이기호, 정용준, 최진영, 황인찬 등 시인ㆍ소설가 33명이 참여했고, 김정환 시인, 황현산 문학평론가가 강연자로 나섰다.

제주작가회의의 이종형 시인은 “해군기지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노인보다는 젊은층”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해군기지 설립하고 손 떼면 끝이지만 주민들에겐 새로 들어온 해군 가족들과 한 동네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숙제가 남습니다. 강정 초등학교 정원이 40명인데 해군 관사에 입주할 아이가 30명이에요. 자칫 공동체 전체가 분열할 수 있고 그 상처는 고스란히 후대의 몫입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강정마을을 보고 고민 하나 얻어간다면 그게 어떤 씨앗이 되지 않겠습니까.”

책마을운동에 대한 현지의 시선은 처음보다 한층 부드러워졌다. 해군기지가 완공되고 나면 당장 싸울 대상 자체가 사라지는데, 책마을을 통한다면 좀더 지속적인 저항이 가능할 거란 기대 때문이다. 마을이 기지촌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책 마을을 반기는 이유다. 고권일 강정마을회 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회 위원장은 “해군과의 면담에서 사창가만은 절대 들어오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확답을 듣지 못했다”며 “아이들이 안심하고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책 마을이 힘이 돼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용준(가운데) 소설가가 11일 제주 강정마을을 평화의 책마을로 만들고자 열린 '2016 생명 평화 문학 in 제주’에서 대학생들과 만나 소설 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정용준(가운데) 소설가가 11일 제주 강정마을을 평화의 책마을로 만들고자 열린 '2016 생명 평화 문학 in 제주’에서 대학생들과 만나 소설 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최근엔 해군기지 반대자들만 있던 강정평화책마을위원회에 찬성자가 들어오는 이례적인 일도 생겼다. 정치적 견해는 다르지만 자녀에게 좋은 책을 읽히고 싶은 부모 마음은 같기 때문이다. 함성호 시인은 강정을 생태평화마을로 만드는 것이 “해군기지 반대 기조를 굽히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정 외 지역에 언제 또 다른 해군기지가 들어설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반대운동에 계속 초점을 둬야 합니다. 다만 이제 몸싸움할 시기는 지났습니다. 갈등으로 황폐해진 공동체를 수습하고 새로 들어온 해군 가족들까지 강정을 평화마을로 만드는 데 참여시키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서귀포=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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