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 원전은 멈췄어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사고 사실 몰랐던 주민들 피폭 과일 우유 그대로 먹어
피난했어도 5년 내 상당수는 스트레스로 사망
공동체 회복과 심리적 보살핌만이 살 길

“저 묘지 옆으로 사방에 집들이 있었어요. 낮에 채소 직판장이 열리고, 밤이면 콘서트장 주변이 시끌벅적했죠. 400명이 넘게 살던 곳에 지금은 12명밖에 남지 않았네요.”
벨라루스 남쪽 작은 마을 구보레비치.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전 우체부로 일했던 지나이다 카다쉬(62)씨는 지난 30년 동안 마을의 변화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강제 대피구역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방사능 피해가 심해 자발적 피난민이 많았던 곳, 불과 10㎞ 떨어진 곳에 접근제한구역이 있다.
낮인데도 마을은 인적이 드물었다. 그나마 마주치는 이들 대부분은 노인이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묘지에는 현재 살고 있는 주민 수보다 훨씬 많은 비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카다쉬씨는 “어린 아이가 있는 집들은 사고 직후 마을을 떠났고 199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사람들이 빠져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저 너머 원전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여긴 알 굵은 감자로 유명한 농경마을이었어요. 사고 이후 스트론튬 오염도가 높다면서 아무도 저희 감자를 사지 않아 가축사료로 밖에 쓸 수 없었죠. 정부는 집과 연금을 주면서 인구를 유입시키려 했지만 일자리도 없는데 누가 여기 살겠어요?”
빈집과 감자밭은 방사능 오염정화에 좋다는 유채꽃밭으로 일찌감치 바뀌었다. 사람의 손이 오래 닿지 않은 호수는 숲으로 변모했다.

떠난 사람들, 남은 사람들
달리 갈 곳이 없었던 카다쉬씨는 가족과 남아 마을을 지켰다. 지방의회에서 이웃들의 피난을 위한 행정문서 작성하는 일을 했다. “사고 당시 무슨 일이 났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폭발 직후 방사선 농도가 최고일 때 아이들은 나무에 달린 사과를 따먹었고 젖소에서 갓 짠 우유를 마셨습니다. 방사능 문제를 알게 된 뒤 생수로 요리를 하고 청소와 빨래를 무척 자주했지만 피폭을 피할 수는 없었지요. 다 큰 아이들은 여전히 몸이 약하고 손녀는 만성 빈혈을 앓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던 그는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이내 목이 메었다. 제염작업에 동원돼 다량 피폭됐고, 뇌졸중과 다른 합병증으로 고생하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는 “주변 인프라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월급을 두 배 받고 연금수혜자가 되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건강을 잃었다”며 “내가 죽기 전까지는 이 비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30년이 흘렀지만 방사능 공포는 여전하다. 건기가 되면 접근제한구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산불로 유해물질이 날아와 숨쉬기조차 힘든 날도 있다. 그런데도 카다쉬씨는 “피난한 이웃 중 대다수가 5년 이내에 스트레스로 사망했다. 대피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이라면, 차라리 고향에서 남아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일종의 체념이었다.

사실 그랬다. 피난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장밋빛 삶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동쪽 외곽에 위치한 ‘발자크 거리’에는 도시 전체가 강제피난구역이 된 프리피야트 주민과 원전 노동자들이 모여 살고 있다. 사고 이후 정부가 제공한 아파트로 4만 4,000여명이 함께 이주했는데, 30년 사이 1만 5,000명으로 줄었다.
이 지역에서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들을 돕는 비영리단체 ‘젬랴키’의 크라시스카야 타마라 대표는 “사고 뒤 5년 동안 자살과 갑작스런 죽음이 많았다. 특히 원전 내부나 제염노동자로 일한 남자들은 갑상선, 기억상실, 면역체계 문제 등으로 고통 받다가 대부분 사망했다. 그래서 여기는 미망인이 흔한 도시가 됐다”고 했다.
의료기관이 관련 정보를 일절 제공하지 않아 이들의 사망에 대한 공식통계는 없다. 체르노빌 사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법은 마련됐지만 피폭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받기가 어려워 수혜자가 되기란 쉽지 않았다. 이에 젬랴키는 전세계 후원금을 통해 치료가 필요한데도 비용을 댈 수 없는 체르노빌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방사능보다 무서운 불안과 공포
“처음에는 그냥 앉아서 함께 울기만 했어요. 휴대폰이나 인터넷이 없었을 때니까. 잃어버린 가족과 친구를 찾는 게시판 같은 역할을 하자는 게 단체의 시작이었죠. 그러다 피해자들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것을 보고 심리치료 프로그램을 마련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타마라 대표는 시간이 갈수록 스트레스가 피해자들 사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대두됐다고 했다. 낯선 환경에 불안한 가정, 여기에 기존 지역민들이 가하는 차별까지. 스트레스의 원인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는 것이다.
젬랴키의 일원인 디아로바 루드밀라씨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고 청년들은 출신을 숨겨야만 직업을 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소비에트 연방체제에서 살 집을 받으려면 오랜 시간 순서를 기다려야 했는데 우리가 자기들이 들어갈 집을 차지했다고 생각해 텃세가 심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심리상태는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체르노빌 사고 20주년을 맞아 국제보건기구(WHO)가 발표한 보고서는 ‘심한 스트레스와 불안,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질환 등이 계속해서 보고되고 있다…생존자보다 피해자로 존재하면서 갖게 되는 무력감과 미래에 대한 비관 탓에 알코올, 게임 중독 등에 빠지기도 한다’고 적고 있다. 그린피스 등에선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죽음과 질병이 수만 건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작은 희망
체르노빌 원전에서 안전기술자로 일했던 루드밀라씨는 피폭으로 장애2급 판정을 받아 연금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그에게 체르노빌 사고는 “하루아침에 나를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뜨린 사건”이다. 그렇지만 그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다 보니 어느새 긍정의 힘이 생겼다. 매일 현실과 싸우고 있지만 함께 버텨보려 한다”며 웃었다. 옆에 앉은 돈두코바 할리나씨도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지리라 믿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염노동자이던 남편 둘을 차례로 잃은 그는 “프리피야트는 내 어머니와 형제들의 무덤과도 같은 곳”이라며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드러내기도 했다.
공동체의 힘은 숱한 재난 상황에서 빛을 발해왔다. 러시아 출신으로 체르노빌 사고 뒤 벨라루스의 오염지역 구보레비치에 눌러 앉은 콘스탄틴 시들레스키(62)씨도 그랬다. “뱃사람이던 저는 러시아 민족주의에 질려 이 마을에 왔습니다. 낯선 저를 환대해주던 사람들, 나쁜 말 하지 않고 서로 챙기며 살아가는 이곳을 이제는 떠날 수 없게 됐습니다. 방사능은 무섭지 않아요. 모스크바나 당신 집, 어디에나 있는 거 아닙니까. 저는 죽을 때까지 여기서 이들과 살 겁니다.”
키예프=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