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집을 비워줄 때가 된 거야.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그러니 자네두 이젠 다 비우고 가게. 여기 있지 말고. 여긴 이제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연극 ‘3월의 눈’ 중)
2년 여 전까지 국립극단의 ‘3월의 눈’과 ‘바냐아저씨’에 출연하며 현역 최고령 배우로 무대에 서온 배우 백성희가 사라짐과 순환의 섭리를 그린 작품 속 대사처럼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가을 낙상 후 건강이 나빠져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그는 8일 11시18분께 그 병원에서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올해 91세였다.
1950년 창단한 국립극단의 현존하는 유일한 창립 단원이자 현역 단원인 백씨가 떠난 것으로 한국 연극 1세대는 이제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울에서 태어난 백성희(본명 이어순이)씨는 17세에 빅터무용연구소 연습생, 빅터가극단 단원을 거쳐 1943년 극단 현대극장 단원으로 입단한 뒤 같은 해 연극 ‘봉선화’로 데뷔했다.
고인은 1972년 국립극단에서 처음 시행한 단장 직선제에서 최연소 여성 단장으로 선출돼 1974년까지 재직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1991~93년 한번 더 단장을 지냈다. 1998년부터는 국립극단 원로단원에 이름을 올렸고 2002년부터 예술원 회원이었다. 2010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배우의 이름을 따 문을 연 ‘백성희장민호극장’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연극평론가 김명화씨는 “식민지시대부터 연극을 시작해 별세 직전까지 현재진행형으로 활동한 한국 연극의 버팀목”이라고 평했다.
고인은 데뷔 후 40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작품은 가리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가 신조였다. 연극에 임하는 자세로 “극 중 인물의 성격 분석은 보편적 이해에 기반해야 하지만 평범하거나 상투적이어선 안 된다”며 “배우는 슬픔에 매여 울어도 대사만큼은 틀림없이 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대표작으로 ‘봉선화’(1943) ‘뇌우’(1950) ‘나도 인간이 되련다’(1953) ‘씨라노 드 벨쥬락’(1958) ‘베니스의 상인’(1964) ‘만선’(1964) ‘달집’(1971) ‘무녀도’(197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81) ‘메디아’(1989) ‘강 건너 저편에’(2002) ‘3월의 눈’(2011) 등이 있다.
연극계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1980년 대통령표창을 비롯해 대한민국연극상(1985), 한국연극인상(1993), 제34회 백상예술대상 여자연기상(1998), 은관문화훈장(2010) 등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구순을 맞아 회고록 ‘백성희의 삶과 연극’도 냈다. 그 책에서 그는 평생을 바쳤던 연극에 대해 “연극은 내가 볼 수 없는 것까지 보게 만들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새로운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참으로 오랜 여행이었지만, 나는 지금 그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에 무한히 감사한다”고 밝혔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연극인들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해외에서 급히 귀국해 10일 빈소를 찾은 배우 손숙은 “전화로 별세 소식을 들었을 때 다리에 힘이 쫙 빠졌다”며 “3, 4주 전 문병 갔을 때만 해도 절 알아보시고 반가워하셨는데 2주 전에는 눈이 안 좋다며 못 알아보시더라”며 안타까워했다. 손씨는 “당장 올해 6월에 같이 할 공연을 기획할 정도로 연극에 열의를 보이셨다”며 “‘영원한 현역’께서 돌아가시니 큰 벽 하나가 무너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빈소를 지키고 있던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한국 배우들의 문제로 대사전달력을 꼽는데 화술의 전범을 보인 대사전달력의 화신이라 모든 연기가 후학들에게는 교범이었다”고 평했다. 연출가 임영웅씨도 빈소를 찾아 “오직 연극만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이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한국 연극을 처음부터 지켜온 분”이라며 “지난 해 봄에 연극 ‘3월의 눈’에 다시 참여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이순재씨를 상대 배우로 정했는데 뜻을 못 이뤄 아쉽다”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 12일 오전 8시 30분, 장례는 연극인장으로 12일 오전 10시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영결식 후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노제를 연다. 장지는 분당 메모리얼파크. (02)3010-2232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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