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는 편집의 예술이다. 방대한 촬영 분량을 쪼개고 붙여 극적인 이야기를 만든다. 어느 요소를 넣고 어느 부분을 빼고 싶은지는 감독과 제작자, 배우 모두 다를 수 밖에. 특히 감독과 제작자는 편집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곤 한다. 예술적 자의식이 강한 감독은 알토란 같은 장면이 잘려나갈 때 제 살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느낀다고 한다. 제작자는 흥행에 도움을 주지 않을 장면이 눈에 거슬릴 만하다. 관객들이 상영시간 100분 정도일 때 영화에 더 몰입한다는 점도 감독과 제작자의 갈등을 부추긴다.
편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쟁 아닌 전쟁은 유구한데 가끔 다른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는 경우도 있다. 감독판 또는 확장판이라는 명칭으로 삭제된 장면이 더해지거나 감독이 원치 않은 장면이 제외된 채 관객과 다시 만난다. 120만 관객을 모으며 확장판 흥행 바람을 일으킨 ‘내부자들: 디오리지널’도 이에 해당한다. ‘내부자들: 디오리지널’ 흥행을 계기로 영화 역사에 새겨진 감독판(또는 확장판)의 사연들을 돌아봤다.
블레이드 러너
‘에이리언’과 글래디에이터’, ‘마션’ 등으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명작이다. 2019년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복제인간들의 반란과 이들을 쫓는 형사 데커드(해리슨 포드)의 대결을 그렸다. 묵시론적인 내용과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묵직한 질문이 당대 최고 비주얼리스트의 세공술에 담겼다. 지난 세기 100대 영화 중 하나로 종종 꼽히나 1982년 개봉 당시에는 푸대접을 받았다. 스콧 감독의 의견이 반영된 113분 편집본에 대한 내부 시사 반응이 부정적으로 나오자 투자배급사 워너브러더스는 117분 분량으로 재편집해 개봉했다. 이후 113분 분량의 편집본이 1990년대 초반 몇 번의 특별 상영회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자 워너브러더스가 스콧의 허락도 없이 감독판 작업에 들어갔다. 스콧이 관여한 진정한 감독판은(116분) 1993년에 비디오 등으로 발매됐고, 2007년 117분 분량의 최종 감독판이 DVD등으로 나왔다. 극장 개봉 당시 내용과 달리 감독판은 데커드도 복제인간일 수 있다는 암시가 담긴 장면을 넣어 평단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황야의 무법자’ 등 서부극으로 명성이 높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유작으로 1984년 개봉했다. 미국에서는 139분짜리 버전으로 개봉했는데 한국에서는 수입사가 상영횟수를 늘리기 위해 100분가량으로 재편집해 국내 관객은 더욱 온전치 못한 내용을 접해야 했다.
뉴욕 빈민가 이탈리아계 소년들의 성장 과정을 통해 미국 역사를 은유한 작품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범죄자가 된 두 친구가 사랑과 돈을 놓고 배신하고 배신 당하는 모습을 장대한 서사구조로 전한다. 영화음악의 대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유려한 음악으로도 유명하다. 유럽에서는 229분 분량으로 상영됐으나 레오네 감독이 원했던 상영시간은 269분이었다. 칸국제영화제 등의 후원과 레오네 자녀들의 허가를 거쳐 2012년 251분짜리 감독판으로 복원돼 칸영화제에서 첫 공개됐다. 레오네 감독이 원했던 나머지 18분에 해당하는 장면은 저작권자가 불분명해 감독판에서 일단 제외됐다.
지옥의 묵시록
‘대부’시리즈로 유명한 프랜시스 포드 감독의 베트남전 영화다. 오페라 ‘니벵룽겐의 반지’를 활용한 도입부 장쾌한 영상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베트남 밀림으로 사라진 한 미군 장성의 행방을 좇는 미군 장교의 여정을 통해 전쟁의 추악한 이면을 드러낸다. 헬리콥터가 밀림을 폭격하는 장면 등 많은 스펙터클 담긴 작품으로 1979년 개봉 당시엔 150분으로 상영됐다. 포드 감독은 2001년 53분을 더한 203분짜리 감독판을 완성해 칸영화제에서 첫 공개했다. 베트남전의 참상과 전쟁의 광적인 면모가 보다 명확히 드러나고 감독의 반전 메시지도 확연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사서독 리덕스
1995년 개봉한 홍콩영화로 왕자웨이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다. 사막을 배경으로 청부살인을 업으로 살아가는 무사, 눈이 멀어가는 떠돌이 무사 등의 삶을 그려냈다. 사랑과 죽음을 둘러싼 쓸쓸한 정서가 지배하는 영화로 선연한 색감으로 꾸며진 화면이 인상적이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주변 배경을 통해 드러내는 왕자웨이 감독의 연출력이 두드러진다. 개봉 당시 상영시간은 100분이었다. 왕자웨이 감독은 영화 원본이 소실되자 2008년 극장 재상영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재편집해 칸영화제에서 공개했다. 일종의 감독판인데 상영시간이 늘기 마련인 여느 감독판과 달리 7분을 줄인 93분짜리 영화였다. 영화 전개가 훨씬 간결해졌다는 평을 받았다. 왕자웨이 감독은 감독판이나 확장판이라는 표현대신 ‘동사서독: 리덕스’로 명명했다. 리덕스(Redux)는 귀환, 복귀를 의미한다.
왕자웨이 감독은 2013년 한국을 방문해 특별전에 참여했을 때 95년 개봉 당시 “한국 상영본은 홍콩 상영본과 달리 무술 장면을 더 많이 포함시켰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인들이 무협영화를 더 좋아한다는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친절한 금자씨
2000년대 한국영화를 세계에 널리 알린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는 특이한 상영본을 지니고 있다. 감독판이나 확장판이라는 수식을 받진 않았으나 독창성만은 상영시간을 더하거나 늘린 영화보다 강하다. 2005년 개봉한 ‘친절한 금자씨’는 200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이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박 감독의 ‘올드보이’ 다음 작품이라 국내외 영화팬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복수는 나의 것’(2002)으로 시작한 박 감독의 이른바 ‘복수 3부작’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아동 연쇄살인범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던 여인의 복수기를 그린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었던 이영애의 연기가 돋보이기도 한다.

박 감독은 당초 ‘친절한 금자씨’의 중반부터 화면이 조금씩 탈색해 결국 완전한 흑백으로 전환하는 실험적인 기법을 활용하려 했다. 디지털기술 발달에 힘입은 기법이었는데 정작 촬영 영상을 본 박 감독이 색감을 제대로 살리기로 결정하면서 끝까지 컬러인 상영본이 개봉했다. 박 감독은 흑백 변환본을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관객이 선택해서 볼 수 있도록 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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