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등반에서는 때로 이성과 본성이 충돌하는 극한상황이 연출된다. 영국 산악인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가 1985년 안데스의 시울라 그란데를 오른 뒤 내려올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하산 도중 하필이면 심슨이 추락, 다리가 부러졌다. 이제 예이츠는 그를 로프에 매달고 내려 오는데 마지막 하강에서 줄이 짧아 심슨이 허공에 떠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예이츠는 심슨의 추락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로프를 붙잡지만 그 또한 함께 추락할 위기에 놓인다.
▦ 두 사람 모두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예이츠는 칼을 꺼내 로프를 자르고 무사히 베이스캠프로 돌아온다. 크레바스에 떨어져 죽을 줄 알았던 심슨 역시 두 팔과 다리 하나로 빙하를 기고 얼음을 씹고 정신착란의 상태에 빠지며 체중 19㎏을 소모한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온다. 심슨은 예이츠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잃었더라면 예이츠는 혼자 살기 위해 동료를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 신년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영화 ‘히말라야’에는 이와 달리 동료를 구하러 나섰다가 자신도 목숨을 잃는 산악인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엄홍길, 박무택이라는 실명과 달리 박정복이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그의 실제 이름은 백준호다. 그는 2004년 박무택, 장민 등과 함께 계명대 개교 50주년 기념 에베레스트 원정대로 나섰다. 그 해 5월18일 오후 3시 해발 8,300m의 캠프5에 도착한 백준호는 박무택과 장민이 그 날 오전 10시 정상에 올랐다 하산하던 중 조난되고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날이 어두워진데다 영하 30도의 강추위와 칼바람 때문에 누구도 구조에 나서지 못하는 그 때 백준호는 홀로 캠프를 떠난다.
▦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말한 ‘죽음의 지대’, 그 곳에서는 조난자를 구할 가능성은 낮고 반대로 구조자마저 위기에 몰릴 가능성은 높다. 백준호는 다음날 새벽 기어코 박무택과 만난다. 박무택은 설맹과 동상으로 탈진한 채 8,750m 지점에 쓰러져 있었다. 두 사람은 그러나 심슨과 예이츠가 살아온 것과 달리 돌아오지 못했다. 산악작가 심산은 백준호의 그날 밤 등반을 “한국 등반 사상 가장 의롭고 외로운 등반”이라고 했다. 영화에서 조금은 소홀히 다뤄진 그날 밤 등반과 백준호라는 실명을 관객에게 알리고 싶다.
/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