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ㆍ정영목 옮김
해냄 발행ㆍ212쪽ㆍ1만4,500원
“내가 선택 받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배웠어요. 우리 하나님, 하늘과 땅의 창조자는 완전히 미쳤다는 것.”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1922~2010)의 마지막 소설 ‘카인’이 국내 번역됐다. 공산당원,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다가 50대 이후 창작에 매진, 76세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가 죽기 1년 전인 2009년 발표한 소설이다. 신성모독 논란을 일으켰던 ‘예수복음’(1991)에 이어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을 통해 신에 대한 의심과 분노를 노골적으로 분출한 문제작이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농부 카인과 목자 아벨이 태어난다. 여호와께 드릴 제물로 카인은 곡식을, 아벨은 새끼양을 준비하지만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물만 흡족하게 받자 카인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동생 아벨을 살해한다. 여호와는 카인을 저주하여 그를 떠돌이로 만들지만 이마에 표를 주어 다른 사람이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고, 카인은 다른 땅에 정착하여 산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아는 구약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다.
그런데 왜 여호와는 카인의 이마에 표를 주고 그를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을까. 죄 앞에 관용이 없는 여호와, 구약 내내 반복되는 ‘인간 박멸’에서 발휘된 그 단호함은 어디로 간 것일까. 카인은 선과 악 사이에서 인간이 뭘 택하는가 가만히 훔쳐 보다가 악을 택하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오는 여호와를 향해 ‘공범’이라 부르는 하극상을 서슴지 않는다. “망을 봐주려고 자리를 뜨지 않은 사람도 실제로 포도밭에 들어가는 자와 마찬가지로 도둑입니다.” 놀랍게도 여호와는 이 말에 일부 수긍하며 그의 이마에 표식을 찍는다. 거래가 성립한 것이다.
이후 고향을 떠나 이곳 저곳을 유랑하는 카인의 모험은 ‘막장 역사 퓨전극’에 가깝다. 그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여호와의 명에 따라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올리는 순간 뒤에서 손목을 낚아 채고, 언어의 분화로 혼란에 빠진 바벨탑 시공자들 사이에 끼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물으며, 멸망하는 도시 소돔에서 롯의 가족이 탈출할 때 그 옆에서 함께 뛴다.
성서에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접목시킨 듯한 장난스런 설정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분노는 결코 장난스럽지 않다. 카인이 발견한 신은 인간을 미워하고 시험하며 가끔은 그 충성심을 놓고 악마와 내기까지 거는 파렴치한, 소돔을 멸망시키기 전 아이가 몇 명 있는지 세 보는 것조차 귀찮아하고 이유도 없이 전쟁을 선동한 뒤 그 손실을 번식의 명으로 메우는 미치광이다. 구약에선 자주 인간들 사이에 나타나더니 현대엔 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을 향해, 사라마구는 “그가 자신의 덜 바람직한 행동 몇 가지, 예를 들어 소돔의 죄 없는 아이들을 신의 불로 삼켜버린 것이 부끄러워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빈정댄다.
역사와 환상을 중첩시켜 세계의 각종 부당한 권력을 효과적으로 풍자해온 사라마구의 방식은 마지막 소설에서도 빛을 발하지만, 그의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존재감이 약할 수 밖에 없다. 그가 신에게 제기하는 의문들은, 더구나 중세도 아닌 21세기에는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신이 왜 선악과 따 먹는 손을 막지 않았는지는 너무 오래된 질문이고 (효과가 있든 없든) 너무 많은 답이 나왔다. 신성모독의 수위로 따져도 ‘예수복음’을 넘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주제는 낡아가고 서슬은 퍼래지는 게 노작가의 숙명이라고 한다면 사라마구를 비난할 일은 아니다. 땅으로 돌아가기 1년 전까지도 그는 신을 향해 겁 없이 삿대질 한 셈이니까.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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