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밝고 합리, 허식 버리고 행복 추구

X세대의 등장 이후 20년이 흘렀다. 40대가 된 그들은 젊은 중년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선보이며 ‘영포티’로 불린다. 게티이미지뱅크

X세대로 불렸던 94학번 이대식(41·LG유플러스 근무)씨는 지난해 휴직을 하고 초등 3학년인 딸아이와 석 달간 세계일주를 다녀왔다. 머잖아 사춘기에 들어갈 딸과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였다. 주변에서는 너무 과감한 결정이 아니냐는 우려 섞인 반응들을 보였지만, 오래 전부터 계획해온, 지극히 마땅한 생의 과제였다. 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잘리더라도 더 좋은 회사에 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해지는 거고, 저한테 가장 큰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매우 단순하죠. 직장생활은 내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 직장에서의 성공이나 인정 받는 것 자체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만큼 의미를 두지는 않아요. 능력을 인정받아 급여가 올라가면 가족과 더 윤택한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요.”

쉬는 날이면 초등 1학년인 둘째를 데리러 전동휠을 신고 학교로 질주하는 이씨는 신기술, 특히 IT기기 마니아다. 처우가 더 좋은 회사도 있었지만, “모든 IT 기기와 기술을 마음껏 써볼 수 있어서” 통신사를 직장으로 선택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유예하지 않고, 새로운 것과 트렌드에 민감한 그는 이전의 중년 세대와는 감각과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중년이라기엔 너무 젊은 ‘영포티(young forty)’다.

X세대 그 후 20년, 영포티로 돌아오다

X세대가 등장한 지 20여년이 흘렀다. 1990년대 초반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며 소비문화의 세례를 받은 첫 세대로 등장해 사회문화담론을 장악했던 이들이 이제 40대가 됐다. 중년이 된 X세대는 어떻게 변했을까. 누구나 40대가 되면 진보에서 보수로, 청년층에서 기성세대로 바뀌게 마련이라는 통념이 X세대에도 적용되는 걸까.

“예전의 40대와 현재의 40대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특히 제2차 베이비붐 세대이자 X세대였던 1970~1974년생들, 여기서 1, 2세 정도를 가감한 연령대의 사람들은 한국 역사상 가장 젊은 40대라고 할 수 있죠.” 매년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분석해온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 소장은 지난달 낸 ‘라이프 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부키 발행)에서 이 새로운 유형의 중년들을 ‘영포티’로 명명한다. “전체 인구를 연령순으로 일렬로 세웠을 때 정중앙에 있는 중위연령이 2014년 현재 40.2세예요. 1970년대에는 20세 전후였고, 1995년만 해도 30세 정도였죠. 과거와 비교할 때 40대는 중년이라기엔 너무 젊은, 여전히 청년인 거죠.”

고령화가 영포티의 등장을 초래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본질적 변인은 아니다. 이들을 젊은 중년으로 만든 것은 X세대가 첫 번째로 받아들이고 경험한 것들이다. 집단적 사고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처음으로 개인주의를 받아들인 세대, 아파트에서 본격적으로 살아본 첫 세대, 소비를 통해 자아를 표현해온 최초의 소비문화 세대, 남 눈치 안 보고 나만 즐거우면 족한 첫 번째 세대…. X세대를 규정했던 이런 정체성들이 영포티를 이제까지의 중년 세대와 다른 새로운 스테레오타입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영포티의 특징으로 여섯 가지를 제시한다. ①내 집 마련에 집착하지 않는다. ②보수냐 진보냐의 이념보다 합리와 상식을 우선시한다. ③결혼, 출산에 대한 관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④현재에 충실하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거나 희생하지 않으며, 일보다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한다. ⑤형식과 허울, 체면치레 같은 허식을 내려놓는다. ⑥트렌드에 민감하다. 왕성한 소비자이자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능력이 높다.

“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자기가 좋아하는 걸 소비할 줄 알고, 과감하게 꿈에 도전할 줄 아느냐 여부로 영포티를 판별할 수 있습니다. 물건 사려고 태어난 것도 아닌데 소비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소비는 삶의 전반에 영향을 끼치죠. 집을 살 것이냐 말 것이냐, 해외여행을 갈 것이냐 말 것이냐, 자동차를 가질 것이냐 말 것이냐.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삶의 형태가 달라지는 거죠. 본격적으로 아파트 생활을 체험한 첫 세대인 영포티는 아파트가 빚 잔뜩 지고서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안 첫 번째 세대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부동산 불패 신화를 무너뜨린 일등공신이죠.” 김 소장은 영포티를 “그 나이가 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이어받지 않고 자신들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낸 첫 중년 세대”라고 말했다.

영포티는 트렌드에 밝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아직도 꿈이 많은 중년들

홍보대행사 대표인 김은(43·여)씨는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없다. 결혼과 출산을 삶의 필수 과제로 여겨온 앞 세대와 달리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인 전형적인 영포티다. 삐삐가 등장하자마자 허리에 차고 다녔고, 대학 때는 시티폰을 사용했으며, 스마트폰이라는 게 있다더라 하던 시기에 이 신문물을 들고 다녔던 얼리어답터이기도 하다. “20대는 공부하고 준비하는 시기였다면 30대에는 전문가가 되고 싶어 일에 매진했어요. 비로소 40대가 되고 나니까 나 자신에게 더 개인적인 행복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죠. TV를 봐도 유재석, 강호동, 김제동, 이휘재 같은 40대가 주축이잖아요.”

젊고자 하는 욕망은 세대 불문 누구에게나 있다. 영포티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늙는 것을 거부하며 젊음을 유예하는 ‘사춘기 좀비’들과는 달리, 몸과 영혼이 모두 젊게, 새로운 방식으로 나이 들고자 하는 세대다. IMF를 겪었고, 88올림픽과 2002 월드컵을 모두 지켜본 세대이며, 해외여행 자유화와 문화잡지의 세례를 받은 경제활황기의 세대답게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마케팅 회사의 실장인 이민선(41·미혼)씨는 “나와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확실히 우리 세대는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성취한 것들을 유지하려는 기존의 40대와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모든 40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포티의 초상은 40대 하면 떠올리게 되는 기존의 아줌마, 아저씨의 모습과 제법 차이가 난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나이 든 기성세대라는 기존의 중년에 대한 정의와 달리 영포티는 결혼해 아이를 키우더라도 그것이 사회적 의무여서가 아니라 행복을 위한 개인적 선택인 경우가 많다. 부모의 역할도 권위를 행사하기보다 친구처럼 소통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과거에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었지만, 영포티에게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자식 낳아 희생하고, 대출인생으로 살며 부동산에 투자하고, 그런 기성세대의 삶이 영포티에게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거든요.” 김 소장은 “첫 번째 개인주인자들로서 영포티는 더 늦게까지 자기 자신의 꿈을 갖고 있는 세대”라며 “기성세대의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영포티, 한국사회를 바꿀까?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촉발한다. 영포티로 인해 한국사회는 어떤 변화를 맞게 될까? “40대는 볼링으로 치면 킹핀에 해당하는 세대예요. 가장 가운데 있으면서 다른 핀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서 그것만 넘어뜨리면 다 넘어지게 돼 있죠. 40대의 부모들은 60·70대고, 자식들은 10대입니다. 직장에서는 중간 관리자로 30대들과 긴밀하게 엮여 있고요. 40대로부터 영향을 받는 세대가 이렇게 광범위하기 때문에 여론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세대라고 볼 수 있어요. 40대의 역할에 주목하고, 40대가 각성해야 하는 이유죠.”

김 소장이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영포티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분석한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나이가 들면 보수화한다는 통설과 달리 현재 40대 초반인 영포티들은 2002년 대선과 2012년 대선 모두에서 더블 스코어로 진보에 표를 던졌다. 40대 후반이 2002년 진보에서 2012년 보수로 달라진 것과 구분된다. “그렇다고 영포티의 정치 성향이 진보라고 단언할 수는 없어요. 보수, 진보의 구분보다는 상식이 통하느냐 아니냐의 합리성과 실용을 더 중시하고, 현재로서는 진보가 그에 더 부합한다고 보는 편이 맞겠죠. 2030세대와 함께 묶일 수 있고, 이들이 40대 후반까지도 이런 성향을 유지할 경우 한국사회에는 큰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구수로도 40대는 2014년 현재 1,000만명에 육박, 10년 단위로 연령대를 분할했을 때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김 소장은 “영포티의 눈에 새누리당도 더불어민주당도 눈에 차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며 “어느 정당이든 고용과 복지 같은 실질적 문제에 대해 정치성을 걷어내고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을 내놓는다면 영포티뿐 아니라 2030세대의 표심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학강사인 김충현(44)씨는 이전의 40대와 나의 40대가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늙지 않으려는 욕구가 강하고, 이를 위한 물적·지적 투자를 많이 한다”는 점을 꼽았다. “윗세대들의 추한 모습을 젊어서부터 봐왔잖아요. 이제는 중년이 돼 적어도 나만큼은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아요.” 이민선씨는 “윗세대에 얽매이지 않고 아랫세대와 소통했던 게 영포티 세대의 특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좋은 방향으로 한국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주도해야 할 책임감 같은 걸 느껴요. 이런 생각을 하는 것 보면 확실히 중년인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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