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사회가 유일하게 추종하는 가치는 돈뿐이지 않습니까. 뜻이 아닌 힘만 추종하는, 개인과 민족 모두의 차원에서 ‘이상이 실종된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함석헌의 가장 통렬한 자기 고발입니다.”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가 7일 ‘함석헌의 씨알사상’을 화두로 강단에 섰다. 김 교수는 이날 서울 중구 명동 전진상교육관에서 씨알재단 주최로 열린 강연에서 “학벌 권력이 없다는 이유로 교수도 아니고 제자도 없었던 함석헌의 사상이 주류학계에서 경청되지 않았지만, 제가 본 함석헌 씨알철학은 전대미문의 언어이자 백성의 각성을 촉구하는 우리 철학의 진수”라고 말했다.
철학, 서양고전문헌학, 신학 연구자인 김 교수는 순수철학의 관점에서 민중운동가이자 기독교사상가, 교육자인 함석헌의 사상을 연구, 소개하며 그 가치를 조명해왔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 사회비평을 게재한 함석헌은 당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자유당 독재를 비판해 투옥되는 등 화제를 모았다. 김 교수는 “20세기 한국 사상은 힘의 철학, 뜻의 철학 딱 둘로 나뉜다”며 “좌든 우든 ‘우리가 힘이 없어서 당했다’는 것을 모든 수난, 고난의 원인으로 보는 세태 속에서 뜻의 망각, 실종을 고민한 것이 함석헌”이라고 평가했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을 논한 신채호의 사관과 ‘피 끓는 힘의 철학’을 말한 박종홍의 사상 등 다수 사상가들이 힘과 능력의 부재를 논했지만 함석헌 만큼은 “백성이 각성하고 생각하고 씨알이 될 것”을 촉구했다는 것이다.
“2014년에 한국이 세계 수출 6위를 기록했잖아요. 사실 덩치로 보면 이 작은 나라가 도대체 얼마나 더 올라가야 마땅합니까. 그런데도 그 돈을 쌓아놓고 누구도 행복하지 않고 어찌 써야 바람직할지도 모르는 상태, 원대한 이상은 잃어버린 채 수난과 고난만을 반복하는 상태가 바로 헬조선이죠.”
그는 씨알철학을 이해하는 주요 열쇠말로 ‘역사’를 꼽았다. 그는 “철학에는 정해진 입구도 출구도 없는데, 서양철학은 그 입구를 수학으로 삼았고 그 결과 인간이 추상적, 사물적 인식의 틀 속에 환원돼 현대 정신의 빈곤의 뿌리가 됐다”며 “하지만 함석헌은 철학과 진리의 현관을 역사로 봤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양의 철학이론에 천착하기보다 한국사회가 지나온 수난의 역사 속에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해 그 뜻을 물어야 한다는 얘기다. “원숭이 흉내 내듯 다른 나라 철학 그만하고 정신의 주체성을 찾자는 거예요. 남의 철학은 그냥 꺾어서 화병에 꽂은 꽃과 같습니다. 예쁘긴 한데 생명력이 없죠. 한국 민중은 68혁명 대신 광주민주화운동의 뜻을, 4ㆍ19혁명의 뜻을 묻고 해석하고 깨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김 교수는 이들 수난 속에서 함석헌이 발견한 진리가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힘이, 권력이 시키는 대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면 우리에게 수난이 있었을 리 없을 텐데 우리가 사랑했기 때문에, 더불어 살기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난을 받아 왔으며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해왔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IMF 극복을 위해 금을 모아줬더니 정부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으로 보답하는 등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위기가 닥치면 늘 희생양을 찾아왔다”며 “희생양 찾기를 중단하고 상생하기 위해서는 바로 한 명 한 명의 개인부터 살아 있는 진리를 찾아 각성하는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함석헌의 음성은 우리에게 ‘지배계급은 민중의 등짝에 난 한 개의 종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외칩니다. 결국은 우리 자신이 우선 깨어나야 한다는 얘깁니다. ‘생명의 본질은 스스로 함이다’라는 말을 곱씹어보세요. 죽어 있는 정신들만이 ‘남이 해줄까 아닐까’를 복지부동 저울질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정치를 진보시킨 우리가 그만 자고 다시 깨어나면 됩니다. 얼마나 끔찍한 역사를 살고도 여기까지 온 정신, 그게 바로 우립니다.”
‘새 신을 신고 새날을 맞이하자’를 주제로 한 이번 강연은 이날부터 매주 목요일 4차례 이어진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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