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월 7일
‘종이학 소녀’ 사사키 사다코는 1943년 1월 7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한 3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히로시마만 아니었다면, 원폭 투하만 없었다면, 맨해튼 계획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제국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수많은 가정들 중 하나라도 맞았다면, 그는 오늘 만 72세 생일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다.
원폭이 떨어진 날 그는 그라운드 제로에서 불과 1.6km 떨어진 집에 있었고, 폭발 충격에 창문이 터지면서 3세 소녀의 몸은 집밖으로 튕겨나갔다. 혼비백산한 어머니가 그를 찾았을 땐 찰과상 외에 별 탈이 없었다고 한다. 신에게 감사하며 피난 떠난 모녀의 몸 위로 방사성 낙진이 함박눈처럼 내렸을 것이다.
소녀는 자라 초등학생이 됐고, 발이 빨라 학급 계주 대표선수로 뛸 만큼 건강하고 활달했다고 한다. 11살이던 54년 11월 사다코의 목과 귀 뒤쪽이 붓기 시작했다. 이듬해 1월에는 다리에 붉은 반점들이 돋아났다. 백혈병이었다.
히로시마 적십자병원 측은 여명이 1년도 남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8월 문병 온 급우가 사다코에게 종이학 1,000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 날부터 소녀는 쉼 없이 학을 접었다고 한다. 10월 25일 숨질 때까지 사다코는 644마리를 접었고, 나머지를 급우들이 채워 친구와 함께 묻었다는 이야기. 사다코의 사연은 급우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함께 ‘사다코와 천 마리 종이학’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고, 영어 등 외국어로도 번역 출간됐다. 하지만 사다코의 아버지는 한 다큐멘터리에서 사다코는 1,400개 가량의 종이학을 접었다고 말했다. 책은 물론 ‘644마리’의 비원설(悲願說)을 채택하고 있다.
58년 히로시마평화공원에 사다코의 동상이 섰다. 동상에는 “우리의 외침, 우리의 기도, 세계의 평화(This is our cry. This is our Prayer. Peace in the world)”라는 글이 새겨졌다. 사다코는 반전ㆍ반핵의 상징으로 떠올라 미국 시애틀 평화공원에도 동상이 건립됐고, 미국 어린이들이 동상 추가건립 모금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확산되지는 못했다. 일본 정부가 무구한 소녀의 희생을 앞세워 전범으로서의 야만을 희석하려 한다는 여론의 역풍 때문이었다. 전쟁의 법적ㆍ윤리적 책임에 성실하지 않았다는 점도 물론 작용했을 것이다. 희생을 그 자체로 추모하기조차 힘들게 만드는 기만 안에서 사다코의 비극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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