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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자포늄과 코레아늄

입력
2016.01.0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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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대학에 가지 못하고 종로학원에서 1년간 재수 생활을 한 것은 정말 행운이다. 대입 재수가 뭐 별거냐고 할 수 있겠지만 종로학원에서 조용호 선생님에게 화학을 배웠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 후 20년 간 한국과 독일의 대학에서 화학을 배웠지만 그것은 모두 조용호 선생님에게서 배운 화학 체계의 단순 확장에 불과했다. 조용호 선생님의 가르침은 사실 단순했다. “화학은 주기율표에서 시작해서 주기율표로 끝나는 거야. 그러니까 닥치고 암기해!”

주기율표는 만물을 이루고 있는 원소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한 표다. 표에서 차지하는 원소의 위치를 알면 그 원소의 물리ㆍ화학적 성질을 알 수 있고 어떤 원소가 어떤 결합을 할지 예측할 수 있다.

내가 고등학교와 종로학원에 다니던 시절 교과서에 실린 주기율표에는 103번까지 있었지만 요즘은 118번까지 있다. 그런데 우주에 이 많은 원소들이 모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원자번호 1번인 수소(H)에서부터 94번인 플루토늄(Pu)까지 중에는 43번 테크네튬(Tc)과 61번 프로메튬(Pm)을 제외한 92개만 자연적으로 존재하고 나머지는 핵폭탄 실험과 중이온가속기 충돌 실험을 통해 확인된 인공 원소다(43번, 61번, 93~98번 원소가 우라늄 광석에서 소량 발견된다는 주장도 있다).

유럽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 내 검출기.
유럽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 내 검출기.

새로운 원소를 합성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별이 자신을 태우면서 핵을 융합하거나 또는 수명을 다한 별이 초신성으로 폭발하는 과정에서도 만들지 못한 원소를 별 난리를 피우지도 않으면서 만든다는 것은 인간이 별보다도 더 위대한 일을 벌인다는 뜻이다.

원소기호는 알파벳 한 개 또는 두 개로 표시한다. 113(우눈트륨ㆍUut), 115(우눈펜튬ㆍUup), 117(우눈셉튬ㆍUus), 118(우눈옥튭ㆍUuo)번 원소기호는 알파벳 세 개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숫자는 단순히 몇 번째 원소라는 표시일 뿐이다. 원소의 발견이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이름과 기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엊그제 12월 30일 국제순수응용화학연맹(IUPAC)은 이 네 개 원소의 존재를 공인했다. 이제 비로소 네 개의 원소는 정식 이름과 두 글자로 된 원소기호를 갖게 될 것이다. 네 원소는 미국과 러시아 합동연구팀이 처음 발견하였다. 따라서 미러 연구팀에게 명명권이 있다. 하지만 IUPAC은 113번 원소에 대해서만은 다른 판단을 했다. 미러 연구팀이 더 먼저 보고했지만 일본의 이화학연구소(RIKEN) 쪽의 데이터가 더 확실하다는 것이다.

미러 연구팀은 115번 원소가 붕괴되는 과정에 113번 원소도 발견했다고 보고했을 뿐이지만, 일본의 이화학연구소는 2004년 원자번호 30번인 아연(Zn)과 83번인 비스무트(Bi) 원자를 50조 번 충돌시키는 실험을 거쳐서 1개의 113번 원소를 생성시켰다. 또한 이 원소가 단 0.00034초 동안 존재한 후 핵분열을 일으켜 다른 원소가 되었으며, 다시 43초 동안 네 차례의 핵분열을 일으켜 안정된 원자핵으로 변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화학연구소는 2005년과 2012년에도 같은 실험을 반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점에서 IUPAC은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유럽과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원소에 이름을 붙일 권리를 획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연구팀의 업적에 찬사를 보낸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 이름을 붙일까? 일본은 나라 이름을 딴 ‘자포늄’, 이화학연구소의 이름을 붙인 ‘리케늄’, 일본 물리학자 니시나 요시오의 이름을 붙인 ‘니시나늄’을 고려하고 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들은 때로는 국수적이다. 원소의 이름만 봐도 그렇다. 많은 원소들이 나라 이름을 갖고 있다. 프랑슘(프랑스), 갈륨(프랑스), 저마늄(독일), 아메리슘(미국), 루테늄(러시아)이 그렇다. 만약에 자포늄(일본)이 추가된다면 왜 코레아늄은 없는지 한탄하는 사람이 나올지 모르겠다. 이런 질문은 왜 우리나라에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대답은 간단하다. 해놓은 게 없기 때문이다.

‘헬조선’의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청년이라면 혹시 헬륨(He)이 우리나라에서 발견한 원소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헬륨은 1868년 프랑스 천문학자가 일식을 관측하는 과정에 발견하였는데, 그리스어로 태양을 뜻하는 헬리오스(Helios)에서 유래하였다. 헬조선이라고 할 때 헬(hell)에는 엘(l)이 두 개나 있지만 헬륨(Helium)에는 엘이 하나뿐이다.

12월 30일 IUPAC의 결정에 따라 주기율표는 빈 칸 없이 꽉 차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전혀 기회가 없는 것일까? 다행히(!) 그렇지 않다. 119번 이후의 원소를 발견하면 된다. 심지어 어떤 이론에 따르면 123~126번 부근에서는 수명이 긴 원소들이 발견될 수도 있다고 한다. 유명한 TV SF 시리즈인 ‘스타트랙’ 시즌 6에는 원자번호 123번인 운비트륨(Ubt)을 발견하고 이것을 스타트랙 설계자인 리처드 제임스의 이름을 따서 제임슘(Rj)으로 명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경험상 SF에서 나온 것들은 대개 실현된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 수도 있다. 그걸 우리가 발견하면 코레아늄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나라 이름보다는 원소의 특성을 살린 이름을 붙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한탄만 하고 있지 말고 일단 중이온가속기를 짓자. 중이온가속기를 지은 다음에는 코레아늄을 찾아내라고 닦달하지 말고 과학자들이 그걸 가지고 뭘 할지 그냥 맡겨 두자. 위대한 발견은 도둑처럼 일어난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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