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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워도 사라지지 않는 죽음의 그림자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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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워도 사라지지 않는 죽음의 그림자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입력
2016.01.0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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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문제집 만드는 일을 하다가 42세에 소설가로 등단한 이유씨. ‘소각의 여왕’은 죽은 자들의 유품을 정리하는 주인공을 통해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문학동네 제공
수학문제집 만드는 일을 하다가 42세에 소설가로 등단한 이유씨. ‘소각의 여왕’은 죽은 자들의 유품을 정리하는 주인공을 통해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문학동네 제공

죽음이 슬픔과 긴밀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죽음은 열패감, 무기력, 짜증, 죄책감과 더 가깝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를 보며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스스로에 실망하고, 그 실망의 근원이 통째로 사라져버리기를 이를 갈며 빌다가, 그런 자신에 경악하고 혐오하는 지독한 굴레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유(47) 작가의 장편소설 ‘소각의 여왕’은 죽음이 지나간 뒤 남은 자들의 이야기다. 고물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유품 정리사인 딸 해미는 오래 앓던 엄마가 떠난 후에도 죽음 안에서 살아간다. 엄마의 죽음에 방관 혹은 기여했을지 모른다는 트라우마 속에서 죽은 자들의 유품을 처리하며 살아가는 해미의 이야기는 메시지의 무게를 덜어내는 밝고 엉뚱한 캐릭터, 박진감 있는 서사, 유품정리사란 직업에 대한 흥미진진한 묘사 등으로 3년 간 수상작을 못 내던 문학동네소설상에 21회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어머니가 서른 후반에 병으로 돌아가신 뒤 제 삶도 그 나이에서 끝날 거라고 여겨왔어요. 지금의 삶은 일종의 덤 같아요.”

지난달 31일 한국일보 사옥에서 만난 이유 작가는 “죽음에 지배된 삶”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5년 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그는 수학을 전공하고 수학 문제집 만드는 일을 하다가 42세에 소설가가 됐다. 독특한 이력은 작품으로도 이어져, 옴니버스식으로 빠르게 이어지는 죽음의 사연들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다. 유품 정리를 의뢰한 청년은 사흘 후 찾아간 해미에게 “(자살에) 실패했어요”라고 고백하고, 동거남이 자살한 방을 정리해달라고 부탁한 여자는 냉동실에 태아를 얼려 놓고 내뺀다.

흥미로운 에피소드에 정신을 팔다가도 작가의 경험담이 녹아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멈칫하게 된다. 눈 앞에서 교통사고를 목격한 이에게 끊임없이 같은 영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주인공의 머리칼에 시취(屍臭)가 절어 붙도록 죽음을 직면하게 하는 게 작가 자신에 대한 징벌처럼 느껴진다.

“잔인하다”는 말에 작가는 “네, 잔인해요”라고 답했다. “매일 아픈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기억, 가족들의 상처, 그게 지금까지 제 인생을 지배해온 것 같아요. 해미의 엄마는 아침마다 딸에게 꿈에서 본 천국 이야기를 해요. 살아 남은 자들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로 느껴질 수 밖에 없겠죠.”

현실과 달리 이야기 속 해미는 무심하고 활기차게 죽음을 취급한다. 피에 전 매트리스 앞에서 돈 될 만한 가전을 일별하고 의뢰자의 표정이 어떻든 득달같이 돈을 받아 챙긴다. 작가는 유품정리의 세계를 알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유품정리사와도 접촉했다. 그들이 영업을 위해 올려 놓은 이른바 ‘비포 & 애프터’ 사진에서는 인간의 영육이 무너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처참한 현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물건을 내다 버리고 벽지까지 깨끗하게 뜯어내 소각시키는 해미의 모습에선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읽힌다.

그러나 소각은 성공적인 살풀이로 이어지지 못하고, 죽음들 앞에서 평정을 잃은 해미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무너져 내린다. 이에 작가는 “죽음이 우리를 파괴해도 삶은 계속된다”고 덤덤하게 말한다.

“죽음의 그림자를 소각하려던 해미는 자기 자신이 소각되고 말죠. 세상이 우리를 파괴한다면 파괴된 채로 살 수 밖에 없어요. 살면서 상처 없이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괜찮은 척할 수 있다면, 그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생각해요.”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이유 장편소설 '소각의 여왕'
이유 장편소설 '소각의 여왕'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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