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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린왕자와 가로등지기

입력
2016.01.0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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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베리의 소설 ‘어린왕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나 역시 오랫동안 ‘어린왕자’를 아주 잘 아는 책이라고 생각해왔다. 연말에 이 책을 주제로 하는 북콘서트 출연 제의에 흔쾌히 응한 데에도 그 이유가 컸다. 그런데 막상 디데이가 다가오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던 거다. 그 자리에 모일 거의 모든 사람이 적어도 나만큼은 이 책을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 말이다. 언젠가 대형서점 주최의 손글씨 쓰기 대회가 열렸을 때 ‘어린왕자’의 구절을 선택해 필사한 응모자가 가장 많았다는 일화도 새삼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였는지 가늠해보기도 어려울 만큼 오랜만에 책을 펼쳤다. 저 유명한 그림이 나온다. 어른의 눈에는 영락없는 모자로 보이지만, 실은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이다. ‘어린왕자’를 처음 읽었던 십대 초반의 어느 날,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내 눈에는 보아뱀이 아니라 모자라서 꽤나 절망했던 기억이 났다. 난 이미 속물이 다 되어버렸다고 머리칼을 쥐어뜯었더랬다. 마침 곁에 있는 만 여섯 살 아이에게 이 그림이 뭘로 보이냐 물으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자”라고 대답한다. 괜히 웃음이 난다.

그러니까 어릴 적의 나에게 ‘어린왕자’는 일종의 반면교사의 텍스트였던 것 같다. 어린왕자가 만나는 속물스러운 어른들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될까봐 진심으로 걱정스러워했다. 보아뱀 속의 코끼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른, 상자를 꿰뚫고 양을 볼 수 없는 어른이 될까봐서 말이다.

지구는 어린왕자가 찾아오는 일곱 번째 별이다. 그 전에 방문한 별들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속물스러운 어른들이 살고 있다. 첫 번째 별에 사는 왕은 자신이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말하며 복종을 요구한다. 두 번째 별의 허영쟁이는 자신을 찬미하고 숭배해달라고 한다. 세 번째 별의 술꾼은 자신이 계속 술을 마시는 이유가 술을 마신다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라고 한다. 네 번째 별의 사업가는 무수한 별들의 숫자를 세고 그것을 소유하려는 사람이다. 그에게 은행이란 별들의 숫자를 종이에 적어 서랍 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두는 곳이다. 어린왕자에게 그들은 ‘이상하기만 한 어른들’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별, 아주 작은 그 별에 도착한다. 거기에는 가로등 하나와 가로등 켜는 사람 하나가 살고 있다.

다시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의아해졌다. 앞의 네 명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기억나는데 가로등 켜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종일 가로등을 꼈다 켰다 하느라 한시도 쉬지 못하는 이 바쁘고 가련한 가로등지기의 삶은 어릴 때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어린 내가 왕이나 허영쟁이나 술꾼이나 사업가가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건 어른이 되면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 믿었다는 뜻이었다. 가로등지기가 되어 몹시 바쁘게 허덕이며 동시에 몹시 지루해하며 살아갈 줄은 몰랐다는 뜻이었다. ‘나는 여기서 아주 끔찍한 일을 하고 있단다’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나의 먼 미래의 모습이라고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상상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지금의 나나 내 친구들과 가장 유사한 이는 가로등지기이다. 지난 한해 하루에 1,440번 가로등을 껐다 켰다 하면서 정신없이 살았다. 권위도 허영도 소유도 심각하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인상적인 것은 그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린왕자의 시선이다. “내가 보기에 우스꽝스럽지 않은 사람은 이 사람뿐이야. 그건 아마 이 사람이 제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정성을 들이고 있기 때문일 거야.” 어린왕자는 그 별을 떠나지만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뿐이었다고 아쉬워한다. 장래 희망은 아니었으나 지금 가로등지기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말이 작은 위로가 된다. 가로등을 성실히 지키다보면 머지않아 가로등 지키는 게 내 삶에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라는 근본적 물음 앞에 맞닥뜨리는 순간도 찾아오리라.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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