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그럴 수 있어?” 눈앞에서 결별을 선언한 연인에게 퍼붓듯, 우린 그날의 기억을 향해 부르짖었다. 참 무식했다. 그리고 용기 있었다. 온두라스 코판에서 하루 만에 세 나라를 주파해 엘살바도르 와이유아로 이동한 ‘大무식’ 사건의 전말.
온두라스 코판에서 거의 현지인 뺨치게 지낼 때였다. 눈치 안 보고 사용할 수 있는 부엌과 페이스북 페이지가 놀랍게도 잘 열리는 인터넷 속도(버퍼링의 천국에서), 널찍한 방과 수압 좋은 샤워기까지. 얼마 만에 만끽하는 호사스러움인가! 하지만 우린 여행자다. 떠나야 했다. 지도를 쫙 펼쳤다. 온두라스와 비슷할 것 같은 엘살바도르는 제쳐두고, 만난 여행자마다 칭송하던 니카라과로 입국할 계획을 세웠다. 그날 밤, 키다리 독일인 여행자와 만나기 전까지는.
“엘살바도르 사람들 참 친절해요.”
사람 그리고 친절이라... 온두라스에서 가장 금기시되던 그 두 용어에 일시에 매료됐다. ‘친절한 사람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가자, 엘살바도르로! 다시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이내 털.썩. 절망했다.
경상북도 크기보다 작은 엘살바도르는 과테말라와 온두라스 사이에 들러붙은 모양새를 띤다. 국경이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유럽과 비슷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전혀 다르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사이엔 도로가 흔하지 않다. 이웃 나라라도 쉽사리 여행할 엄두를 못 낸다(주머니 사정은 별개로 하더라도). 목적지인 산타아나로 가려면, 이미 여행한 과테말라를 거쳐 엘살바도르로 가는 게 답이었다. 유일한 답인데, 꼭 오답 같았다. 지도 앞에서 분노의 헤드뱅잉을 하자, 숙소 주인이 솔깃할 만한 정보를 흘렸다. 코판에서 산타아나로 넘어가는 셔틀버스, 즉 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버스가 있다는 거다. 올랄라! 4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먼 당신이었다. 36달러, 그 돈이면 당시 우리에겐 100만원과 다를 바가 없는 거금이었다. 우린 돈 대신 체력을 축내기로 했다.
어느 금요일. 날씨는 맘을 닮아 흐림. 각자 40kg에 달하는 배낭을 지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자, 세 나라를 하루 만에 주파하자! (휴~~)
▦코판(온두라스) → 엘플로리도(온두라스-과테말라 국경)
한 고개를 힘겹게 넘는 산간 도로. 고작 10km인데 40분여 소요됐다. 국경을 넘는다는 건 환전상과의 협상이 따라붙는다는 이야기다. 과테말라에서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케찰(과테말라 화폐)로 소정의 돈을 환전했다. 스스로 오늘의 ‘어이 상실’ 여정에 힘을 주고 싶었는지, 과테말라 입국 도장을 다시 받으며 "과테말라 사랑해!"라고 고백도 했다.
▦엘플로리도 → 치퀴물라(과테말라)
2시간여 걸린다. 50km 거리였는데 어떻게 하면 그만큼 걸리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과테말라에선 보기 드문, 꽤 신식 미니버스여서 좀 감탄했다. 아니, 본능적으로 감탄할 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치퀴물라 → 안구이아투(과테말라-엘살바도르 국경)
치퀴물라에서 버스기사가 내려준 곳은 터미널이라기보단 시장통에 가까웠다. 교통비만 빼고 시장 먹거리를 구매하는데 남은 케찰을 털어냈다. 그사이 비쩍 마른 사내가 버스 문을 두들기며 안구이아투행 승객을 끌어 모았다. 이미 만석임에도 버스는 한 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재래시장을 순회했다. ‘드디어 출발!’하는가 싶었는데 10분도 지나지 않아 중남미에선 ‘아주 중요한' 기사의 점심시간이 되어 다시 정차했다. 점심시간 한번 참 관대하다. 60km를 이동하는데 결국 2시간30분이 걸렸다.
▦안구이아투 → 메타판(엘살바도르)
국경에서 엘살바도르 입국 도장을 받았다. “드디어 엘살바도르다!”란 감흥은 없었다. 최종 목적지는 엘살바도르의 산타아나였다. 가이드북에는 안구이아투 국경에서 산타아나까지 직행버스가 있다고 했다. 현지인에게 확인해보려 했으나 국경은 서부영화 찍기 좋은 허허벌판이었다. 우선 산타아나행 버스가 많은 메타판으로 가보기로 했다. 메타판행 버스가 출발한 지 30초 후, 반대편 차도로 산타아나행 푯말이 붙은 버스가 스쳐 지나간다. 하늘도 우릴 버렸다.
▦메타판 → 산타아나(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에 왔음을 확실히 느낀 것은 바로 버스 안 풍경이었다. 차장이 손님 각자에게 행선지를 묻고 ‘우아하게’ 종이 티켓을 끊어줬다(과테말라에선 구두로 행선지를 묻고, 여행자에겐 웃돈을 받는 게 흔하다.) 게다가 엉덩이 비집기 기술로 3인석을 5인석으로 개조하는 과테말라와는 천지 차이였다. 엘살바도르인들은 끼어 앉기보다 때론 서는 걸 택했다. 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내친김에 더 멀리 가보고 싶었다. 엘살바도르에서 첫 여행지로 삼고 싶었던 와이유아까지. 47.5km밖에 안 되는 거리를 2시간여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이런 미친 결정을 내렸다. 체감 탑승시간은 1분이 1시간처럼 점점 늘어갔다.
▦산타아나 → 와이유아(엘살바도르)
산타아나 종점이라 해서 내렸더니 와이유아행 버스가 있는 공용터미널과는 멀찍이 떨어진 사설 터미널이었다. 시체처럼 공용터미널까지 걸었다. 온두라스에서 국경을 넘은 게 오전 9시, 오후 6시가 넘어서야 냄새에 찌든 몸을 드디어 와이유아행 버스에 실었다. 40분 걸린다던 이 버스도 1시간20분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온두라스의 코판에서 엘살바도르 와이유아까지. 서울에서 대구보다 짧은 216km란 거리를, 세 나라에 걸쳐, 10시간 만에 주파했다. 쌀 가마 같은 배낭을 14번이나 버스에 올리고 내렸다. 당일 코판에서 건너왔다고 했더니, 호스텔 직원의 동공이 두 배로 커졌다.
“그게 진짜 가능하단 말이야?”
2016년 병신년의 총 운세를 찾아보니, 뭐든 끝까지 밀고가야 문이 열린다고 하더라. 무식해질 용기가 필요한 해다. 이런 국경 넘기 이후, 우리가 감히 뭘 못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까짓 것, 덤벼봐라 새해야!
▦여행의 선물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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