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탤런트(배우) 김덕현
‘가짜 효자’ 김덕현, 이젠 진짜가 되렵니다
나는 효자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니는 가족 모임이 있을 때마다 어린 시절 내가 얼마나 당신을 끔찍하게 생각했는지 이야기 하신다.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덕현이가 대여섯 살 되었을 무렵이었을 거야. 5원짜리 아이스께끼를 사주면 그걸 냉큼 꺼내서 먹지 않았어. 엄마가 더워 보이니까
내 얼굴에 얼음막대를 비비면서 ‘엄마, 시원하지?’ 하고 말했지. 암, 시원했지. 엄마를 생각하는 그 마음에 얼마나 기특했는지 몰라.”
그때마다 형님들은 “덕현이가 막내라 애교가 있었죠.”하면서 정말 믿는 눈치다. 몸 둘 바를 모르는 건 나뿐이다.
그 시절, 어머니는 매일 집에서 5km나 떨어진 시장을 다녔다. 집 앞에 시장이 있었지만 먼 데 있는 시장이 채소를 몇 원 더 싸게 판다는 걸 알고 그 먼 거리를 걸어가신 거였다. 여름엔 시장에 한번 다녀오면 그 숱 많은 머리가 축축해질 정도였다. 나는 어머니 고생엔아랑곳 않고 “5원만 주세요. 아이스크림 사먹을래요.”하고 졸랐다.
어머니는 지갑을 열어 흔쾌히 5원을 내놓으셨다. 그 5원은, 어머니가 왕복 10km를 걸어서 아낀 반찬 값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한두 번 막대 아이스크림을 당신 얼굴에 문지른 건 어제 일처럼 떠올리면서도 몇 년 동안이나 5원 때문에 10km를 걸어 다닌 건 전혀 기억을 못하는 눈치다. 어머니의 이상한 기억력 덕분에 나는 효자가 됐다. 황송하기 짝이 없는 효자다.
다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우리 집은 아이스크림 값 하나도 아껴야 할 만큼 가난했다. 간혹, 어머니가 10km나 걸었던 일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잊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 더 힘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7남매와 어머니, 폐가에서 보낸 한 시절
우리 가족이 서울에 올라온 것은 1967년이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노름에 빠져서 다섯 마지기쯤 되던 전답을 모두 날리고 혼자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가족을 고향에 남겨두고 떠나간 아버지는 해가 다 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어머니가 나를 들쳐업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거여동에 있던 아버지의 친구네 집을 찾았다. 친하게 지냈던 분이라 분명 소식을 알고 있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요. 어디서 뭘 하는지 전혀 소식을 모릅니다. 보다시피 저도 식구들 먹여 살리기가 팍팍해서 친구들 만날 겨를도 없어요.”
어머니는 밖으로 나와 골목 어귀에 하릴없이 서 있었다. 아무 소득 없이 시골로 돌아가기가 너무 허전했던 거였다. 그렇다고 서울에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막 다시 걸음을 놓으려는데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선 곳에서 십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집이었다. 지붕이 곧 무너질 듯 실그러져 있고, 부서진 대문 안으로 갈대처럼 우거진 쑥대가 보였다. 누가 봐도 폐가였다.
어머니는 아버지 친구네 집에서 걸레를 빌려와 폐가의 방바닥을 닦았다. 대강 청소를 하고서 하룻밤을 지낸 후 시골로 내려와 6남매를 모두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얼마 후 아버지가 능곡동에서 국수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식당 일로 돈을 벌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국수집은 겨우 폐업을 면할 정도였다. 게다가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했다. 어머니가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지 않으면 당장 굶어죽었을 것이다. 형들도 학교를 다닐 나이에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몇 해 뒤 단칸방 폐가를 벗어나 다른 동네로 이사했지만, 그곳도 서울에서 빈민촌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어쨌거나 더 이상 천장에 비가 새는 걸 걱정할 염려는 없었다.
월드스타도 반한 “어머님의 국밥”
그 시절 어머니를 가장 힘들게 한 건 7남매 중 가장 효자라고 치켜세우는 나였다. 폐가 시절, 어머니는 밤에 잘 때도 나를 바닥에 누이지 않았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자다가 혹시나 체온이 떨어질까 봐서였다. 나를 등에 업고서 엎드려 잤다. 낮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늘 업고 일했다. 하도 업혀있다 보니 결국 탈이 났다. 엉덩이에서 허벅지로 이어지는 부분이 곪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고름이 나다가 살이 찢어졌다.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병원에 갈 형편이 못됐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구한 몇 가지 약초를 잘게 갈아서 뿌린 뒤 밥을 짓이겨 붙였다. 신기하게도 찢어진 곳에 생살이 돋았다. 흉터는 남았지만 후유증 때문에 고생한 기억은 없다.
나는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병원을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형과 누나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아프면 늘 지극한 간호로 병을 쫓았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어머니는 우리를 방에 누이고 “엄마 손은 약손”하면서 배를 문질렀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모든 어머니들이 다 그렇다고 하겠지만, 내 어머니의 ‘약손’은 그 누구보다 특별했다고 믿는다. 무슨 상처이든지 어머니가 손을 대면 깔끔하게 나았다.
어머니의 손길은 잔병치레뿐 아니라 무엇에든 ‘효과’가 있다. 때로 동화 속에 나오는 선한 마법사가 연상된다. 어머니의 손이 닿으면 마법처럼 모든 게 좋아진다. 이를테면, 어머니에게 고양이나 강아지를 맡겨놓고 며칠 뒤에 가보면 털에 윤기가 흐른다. 죽어가던 화초도 싱싱하게 살아난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손을 거치면 신기할 정도로 따스한 공간이 된다. 겨울 내내 감기를 달고 사는 손자, 손녀들도 충주에 있는 어머니 집에 지내면 재채기 한번 하지 않는다. 신기한 일이다.
어머니의 ‘손’이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분야는 요리다. 내 어머니의 요리에 반한 연예인들이 적지 않다. 지금은 월드스타가 된 탤런트 동료 한 명은 어머니가 끓여주신 소고기 무국 이야기를 한다. 전국에 맛있다는 국밥집을 다 먹어봤지만 우리 집만큼 맛있는 곳이 없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어머니의 손맛이 놀라운 건 별다른 재료 없이 그런 명품 요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맛있게 먹었던 반찬 중의 하나는 단무지 볶음이었다. 도시락 반찬이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친구들이 늘 내 책상으로 왔다. 단무지 볶음을 얻어먹으러 오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들이 싸오는 소시지나 계란 프라이가 부러웠지만 친구들은 “계란 프라이와 바꿔먹자.”고 할 정도로 내 단무지 반찬을 맛있어했다. 그냥 단무지를 콩기름에 볶았을 뿐인데 어떻게 그런 맛이 났을까.
보리차도 그랬다. 특별히 무얼 더 넣거나 남다른 비법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저 시장에서 사온 볶은 보리를 넣어서 끓이는 게 다였다. 그런데도 그렇게도 구수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보리차와 관련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나는 대구에 있는 50사단에서 훈련을 받았다. 대구는 미인과 폭염으로 유명한 도시다. 나는 대구가 한창 뜨거울 때 훈련소에 들어가 내 생애 가장 혹독한 여름을 보냈다. 석 달 만에 가족들이 면회를 왔다. 어머니는 불고기, 통닭 같은 음식과 함께 커다란 말통에 보리차를 담아오셨다. 여관에서 밤새 끓였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훈련받는 내내 보리차가 생각났다. 말통에 든 보리차를 혼자서 2/3 넘게 마셨다. 나는 죽을 때까지 대구의 그 혹독한 더위와 구수하고 시원한 내 어머니의 보리차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이 마흔 넷에 기저귀를 찬 사연
나이가 들수록 궁금해졌다. 특별한 재료나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음식을 만들면 평생 잊을 수 없는 맛이 나고, 화분 하나를 키우더라도 누렇게 시들어가던 이파리가 새싹처럼 살아나는 이유가 뭘까. 몇해 전 어머니의 비밀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 사건이 있었다.
2011년, 나는 처음으로 사극에 출연했다. 배역을 따놓고 나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사극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익히는 것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말 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말을 못 타면 바로 ‘퇴출’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나는 포천 경마장으로 내려갔다. 말은 처음이었다. 무조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 등에서 중심이나마 잡을 수 있게되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엉덩이가 까져서 피가 난 것이었다. 상처가 난 부위도 묘했다. 항문 바로 위였다. 그 상태로 계속 말을 탔다간 엉덩이가 피범벅이 될 게 뻔했다. 쉴 수도 없었다. 촬영 시작이 코앞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충주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갔다. 답답한 마음이라도 털어놓자 싶었다. 어쩌면 오랜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머니 앞에서 펑펑 울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누워봐라. 상처부터 보자.”
어머니는 상처가 난 부위를 가만히 살폈다.
“일단 며칠 뒤에 와봐라.”
하소연이나 실컷 하자고 찾아갔지만 올 때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대문을 나섰다. 며칠 뒤에 찾아보면 어머니가 거짓말 같은 해결책을 마련해 두셨을 것 같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며칠 나름의 방안을 강구했다.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것이 바로 기저귀였다. 어머니는 하기스 기저귀에 부드러운 목도리를 붙였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한나절 넘게 바느질해서 ‘작품’을 만드신 거였다.
“이거 입고 말을 타면 안 아플 거다. 더 필요하면 또 와. 내가 만들어둘게.”
나는 어머니의 기저귀를 차고서 촬영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말을 탈 때도 통증이 거의 없었다. 백약을 쓰더라도 그 짧은 시간에 치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중에 사연을 들은 감독(김종선)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말 훌륭한 어머니시네. 정성이 대단하셔. 신사임당 같은 분이야. 어머닐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해서 이번에 꼭 뜨도록 해.”
감독의 말 중에 ‘정성’이라는 단어가 귀에 쏙 들어왔다. 그렇다.
정성. 돌이켜 보면 풍족하지도 않은 일상에서도 늘 놀라운 것들을 빚어내곤 하셨던 어머니의 삶의 비결은 ‘정성’이었다. 마흔을 넘긴 아들에게 기저귀를 채우겠다는 생각을, 내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누가 했을까.
‘빛’나는 연기자가 되는 비결, 어머니의 정성
그렇게 고생하며 찍은 <광개토태왕>에서는 큰 빛을 보지 못했지만 나는 열쇠 하나를 받아든 느낌이었다. 내 어머니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무엇이든 빛을 발하게 했듯이 나도 어머니처럼 한다면 서서히 빛나지 않을까 하는. 연기자는 ‘빛’이 있어야 한다. 그 빛이 조금씩 강해지다 보면 어둠을 뚫고 모든 이들이 주목하는 ‘스타’가 될 수 있다. 어머니의 정성을 본받아서 내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열심히 닦는다면 사람들을 결국 내게서 ‘빛’을 볼 것이다. 아직은 겨우 ‘미명’이지만 언젠가는 바다 건너 사람들도 내게서 빛을 발견하지 않을까.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나는 여태껏 남들만큼만 열심히 살아왔다. 대충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는데 말이다. 모든 걸 걸었던 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시간이 많다. 이쯤 살고 나면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탤런트 공채에 성공한 뒤에 식당을 열었다. 불안정한 연기자 생활을 든든하게 받칠 ‘생업’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였다.
나는 로드샵에 중국 고급 요리점을 열었다. 당시는 고급 중국 요리집을 가려면 호텔 문턱을 넘어야 하던 시절이었다. 희소성 때문인지 처음에는 잘 됐다. 연예인 단골도 많았다. 고(故) 앙드레 김 선생님을 비롯해 HOT, 오연수ㆍ손지창 부부, 정우성 등 수많은 스타들이 드나들었다. 한창 잘 나갈 때는 ‘소형 방송국’이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그때는 든든한 지원군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부업에 눈돌리지 않고 연기에 모든 것을 올인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두 번 살 수 없다.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연기자로서의 내 삶을 완성해야 한다.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주신 숙제다. 어머니와 같이 살던 시절, 당신은 촬영이 잡힌 날이면 새벽 3시에 일어나 떡국을 끓여주셨다. 일 년 내내 떡국이었다. 밥은 목 넘기기가 힘들 수 있다고 술술 잘 넘어가는 떡국을 끓여주신 거였다. 지금 마음을 새롭게 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지극한 정성을 무위로 돌리는 불효를 하게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어머니는 내가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다. 사실, 연기 재능도 어머니의 선물이다. 나는 종종 ‘내 연기 재능은 누가 물려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는 엄하신 분이었고, 연기자로서의 재능은 전혀 없었다. 어머니 역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않으셨다. 나는 스스로 ‘돌연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오해가 풀린 것은 5년 전쯤이었다. 모 아침 방송에서 우리 가족을 취재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나의 소소한 일상과 함께 충주에 계신 어머니 집에 다녀오는 장면을 담자고 했다. 리얼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설정은 필요하다. 피디는 ‘아들이 왔다는 소식에 종종 걸음으로 달려 나와 대문을 여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촬영하기로 하고 어머니에게 연기를 부탁했다. 나는 어머니가 잘 하실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웬걸, 피디가 감탄을 할 정도로 잘 해냈다.
“어머니 예전에 연기하신 적 있으신가요? 애드립도 너무 자연스러우세요.”
그때 깨달았다. 내 재능이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구나. 피디 말마따나 세상을 잘 만났으면 빛나는 ‘스타’가 됐을지도 모른다. 나보다 훨씬 더 빛나는 스타. 새삼 미안했다. 재능부터 곡진한 뒷바라지까지, 어머니는 내게 모든 훌륭한 것들을 주셨는데 나는 아직 제대로 해낸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하지만 말고 ‘진짜 효자’ 되어야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우리 막둥이가 천생 효자”라고 칭찬하실 때 그저 무안해하지만 말고 어머니의 거짓말을 참말로 바꿀 결심을 했었어야 했다고. 이제사 결심한다. 어머니의 말대로 진짜 효자가 되어야겠노라고.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당신처럼만 살면 된다. 어머니가 내게 해주신 것처럼만 하면 될 것이다. 무엇이든 정성스럽게, 한결같이, 늘 희망을 품고서. 그것이 어머니가 내게 평생 삶으로 가르쳐주신 ‘빛나는’ 인생의 비결이다.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내 이름 앞에 ‘국민 불륜남’이라는 닉네임이 붙는다. 언젠가는 ‘국민 배우’라는 타이틀로 바꾸고 싶다. 그런 날이 오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내 어머니를 방송에 모셔보는 것이다.
‘국민 배우’ 뒤에 ‘국민 어머니’가 계셨다는 자랑을 하고 싶다.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내 마음 속의 ‘국민 어머니’가 더 나이 드시기 전에……. *
김덕현
1967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했다.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과를 졸업했고, 이병헌 등과 함께 KBS 14기 공채 탤런트에 선발됐다. KBS 2TV 인기 드라마 <사랑과 전쟁>으로 ‘국민 불륜남’이라는 닉네임을 얻었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으며 2015년 출연한 <태양의 도시>, <징비록>이 가장 최근작이다. 얼마 전부터 행사 기획과 MC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참고 - 위키백과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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